싸움 구경은 재미있다.

치고받는 싸움이 아니라 친구간의 사소한 말다툼이라 하더라도 "이기기" 위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주위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감정이 앞선 물리적 싸움은 서로에 대한 상처로 끝나기 쉽지만 관용이 전제된 지적 싸움은 재미와 함께 발전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개입된 우리 사회 기성세대들의 논쟁은 시작부터 불공평한 소모전이라는 생각에 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한다.

99년 본격적으로 등장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논쟁은 정부와 시민단체간의 단순한 의견대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념관 건립 반대는 "박정희"라는 개인적 인물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극우 이념의 지배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동안 기념관에 대한 찬반 양론이 팽팽히 대립했지만 건립 자체의 백지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기념관" 대신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식의 중도적 입장이 소리를 높이면서 논의의 초점은 기념관을 어떤 목적으로 지을 것인가에 맞춰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조직부장 방학진씨는 "여론을 수렴하지 않는 밀어붙이기식 정책 결정은 규칙없는 게임과 같다"며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기념관 건립에 대한 찬반 의견은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지며 대립하고 있지만 제대로된 논의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여느때와 같이 귀를 막고 눈을 가린 권위적인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와 개인의 일방적인 저항만 있을 뿐 결과는 애초의 계획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김동춘 교수(성공회대.하회학)는 "그동안 진행된 논쟁들은 당사자들이 균등한 입장이 아니었다.

개인의 소신있는 주장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사회적 매도는 사라져야 한다"며 우리의 논쟁 문화를 꼬집는다.

그러나 기념관 건립 반대 의견이 정부와 언론의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왜곡되지 않았던 점, 반대 여론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표출된 점은 우리 사회 "변화"의 조짐을 느끼게 한다.

인터넷 사이트나 신문, 잡지를 통해 꾸준히 진행된 안티조선 운동은 "달걀로 바위치기 "식의 논쟁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의 예에 비춰본다면 반조선일보논쟁 역시 언론 권력에 대한 사회적 마이너리티들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났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8월7일(월)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들과 사회인사들이 "조선일보 기고, 인터뷰 거부"를 통해 본격적인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 기고 거부 지식인 모임 대표 김동민 교수(한일장신대, 언론학)는 "조선일보는 자신의 극우, 수구적 정체를 감추기 위해 진보적 인사를 이용하고 있다"며"조선일보의 성향을 드러내 독자들이 정당한 평가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한다.

지식인드의 "조선일보 거부선언"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지식인들이 공통된 목소리를 냄으로써 일반시민들에게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은 의제 자체에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에 있어서는 비판의여지를 남긴다.

문학편론가 전병문씨는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는 주목받지 못했던 과거의 소극적 태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글쓰는 스타일만으로는 비판의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지금의 논쟁이 조선일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감정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김동민 교수는 안티조선 운동을 조선일보가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성격을 분명히 해 극우신문으로서의 지위만을 지녀야 한다"며언론개혁의 일환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형성되고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지배 권력이 더이상 외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성역"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 지식인들의 움직임은 "성역 해체"의 과정이며 궁극적으로는 일반 독자들의 행동이 중심이 돼야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변화를 우리의 의식이 성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치열하지만 생산적인 논쟁이 오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지나친 환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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