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당시,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에 맞섰던 이들이 얼마 전 "80년, 봄날 동우회"를 결성했다.

그 중 형난옥씨를 만나기로 한 날, 부슬대던 봄비 탓에 약간의 우울함이 느껴졌다.

20년전, "민주화의 봄"을 갈망하던 이 맘때 분위기도 이렇지 않았을까. 숙대신보사 기자를 한 경험이 있다며 우리를 반긴 형난옥씨. 중간에 도중하차한 사연을 들려주면서 "당시 대학언론은 권력 눈치보기만 급급했던 보수언론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수습기자를 마치고 막 정식기자가 됐을 때, 잘해보겠단 의욕에 넘쳐있던 그녀는 여공, 버스 안내양 등을 동행취재한 "우리는 동갑내기"란 기사를 준비했단다.

"재봉틀에서 하루 20시간씩 일하는 열악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게 문제였조. 그때 어려운 노동자, 빈민 이야기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조." 반강제적으로 신문사를 나온 그녀는 3학년 때 과대표를 맡으며 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 땐 정말 학생들의 참여의식이 높았어요."라며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때의 일을 들려준다.

"전교생 90%가 한꺼번에 모여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조. 오히려 시위진압을 위해 들어온 경찰들이 "포위"된 적도 있어요." 유난히 가두시위나 집회가 잦았던 80년 5월, 그토록 많은 인원이 격렬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오랜 억압을 받아오면서 학생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그만큼 강했던 결과"라고 확신하는 그녀. 대화 내내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도 80년 5월17일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할 때,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총학생회대표단 회의가 진행중던 가정관 식다에 갑자기 계엄군이 들이닥쳤죠. 른 동료들은 몸을 피했지만 전 발목을 다친 상태여서 혼자 그 자리에서 잡히고 말았구요." 광주항쟁 전, 서울지역학생들의 운동을 미리 막으려는 군부정권의 계산된 조치였다.

검거된 후 합동수사본부에 있는 동안, 그녀는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고문, 학대 등을 보며 동료들이 해 온 일이 옳았다는 확신을 더울 굳힐 수 있었단다.

"나라를 걱정해서 하는 일이 뭐가 그리 부당다는 것인지..." 그 때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이 앞장서서 솔선수범한 것이 학생들의 지지와 참여를 얻어내는 주용한 힘이었던 것 같다는데. 소위 운동권으로 불리는 학생들 대부분이 검거돼 학생운동이 소강상태에 들기도 했지만 당시는 "학생운동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는 형난옥씨. "지금은 그 때처럼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휘, 감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원래 외교관이나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녀는 출판 일도 너무나 만족하고 있단다.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달할 수도 있고 의식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쟎아요. 그래서 전 이일을 대학 때 추구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해요.:란 형난옥씨는 현암사 주간으로 "소피의 세계"등 유익하면서 인기를 끈 책들을 많이 기획했다.

"대학시절 같이 울고 웃던 동료들이 지금 다 뭘하는지 참 구금해 동우회를 결성하게 됐다"는 그녀. 15일(월)에 있을 "80년 학생운동, 그 후 20년 "모임이 기대되는 듯 표정이 밝았다.

형난옥씨를 비롯한 "80년, 봄날 동우회"동료들이 맞는 지금의 봄은 과연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젊은 시절의 봄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이현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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