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코미디언 그리고 성우. 지하철 정비공, 항공기 조종사, 전화번호 안내원, 프리랜서 애니메이터. 이 전혀 관련없을 것 같은 직종들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노동조합이 잇다는 사실.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노동조건의 유지·개선 및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조직하는 단체’란 의미의 노동조합. 그렇다면 탤런트가 과연 노동자인지,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노조)는 19세기 말엽 등장했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상륙과 거의 동시에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미 근대적 노조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현대, 대우, 지하철 등 재벌기업과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파업을 통한 고용안정, 노동시간 단축 등의 주장은 사람들에게 ‘빨갱이’란 과거의 인식과 더불어 집단 이기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배우나 파일럿, 애니메이터의 노조는 생소하기 그지없다.

이런 고정관념을 비웃는 듯, 한국방송연예인 노동조합은 이미 8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탤런트 출신 위원장 이경호씨는 “캐스팅은 배우에게 잇어서 생존권의 문제”라며 “이것이 기획자에게 일임되면서 성거래, 인권유린, 금품수수 등의 비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방송인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따라서 기획자 눈에 벗어날 경우 몇년씩 배역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최소한의 기본권리인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노후대책이 있을리도 없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스타로 포장된 방송계 이면에서는 생산직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들이 그들의 목을 죄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전세계 만화영화의 60% 하청제작, 관련 노동자 2만여명, 22개 대학의 애니메이션과 설립 등 애니메이션에 쏟아지는 최근의 관심은 열화와 같다.

하지만 지난 8월7일 창립보고대회를 마친 전국애니메이션노동조합 위원장 류재운씨는 이같은 반응을 거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그림 한 장당 500원씩이던 단가는 15년 전과 똑같은데다 퇴직금을 받아본 애니메이터는 40여년간 두명 정도 뿐”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 혜택, 산업재해 보상도 없음은 물론 더위, 추위에 시달려야 했던 열악한 노동여건이었다.

게다가 해마다 700여명씩 쏟아지는 애니메이션학과 졸업생들은 이미 과포화 상태인 애니메치터 세계에서 한달 3만원의 수입도 올리기 힘든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찾기나 정부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은 인식조차 갖기 힘들었다.

이처럼 화려한 겉포장 밑에 감춰진 노동 현실의 참혹하은 더욱 더 노조를 필요로 한다.

한달도 채 안돼 조합가입자가 1천500여명에 달하는 애니메이션계는 지금가지 전문기술을 지닌 비정규직에서 얼마나 노조의 존재가 절실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노조들은 단순히 ‘임그교섭, 복지향상 등을 위한 협의·조율 단체’란 의미로 소급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은 팀제, 불규칙 시간 근로, 성과위주 임금 등 그 시스템 자체가 기존 직종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노조운동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성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며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존의 기업 중심 정규직 노조와는 다른 전략전술로써 전문성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우리학교 이철수 교수(법학과)는 말한다.

지금가지의 노동조합운동은 대규모 사업장 중심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나 소규모 사업장은 불가피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나무 가 자랄수록 잔가지가 무성해지는 것처럼 노동계 전체가 커갈수록 비정규직 노조의 역할 역시 더욱 중시된다.

전국민주 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 허영구씨는 “인권·사회정의적 측면, 전체노동자 권력의 향상 측면에서 이같은 비정규직 노조의 움직임은 바라직하게 평가된다”며 “앞으로 건설 일용직, 목욕탕 때밀이, 방 종업원, 프로야구·축구 선수들까지도 모두 조직화할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비정규직 외에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금지된 공무원 노조에 대한 대책 마련도 고민해야 한다.

8월30일(월) 발기인대회를 마친 대한항공 운항승무원 노동조합은 ‘공무원 노조 금지’라는 세계에서도 유일한 법규정에 의해 불법단체로 취급받고 있다.

회사 규정에 의해 조종사들은 비상시 청원경찰로서 임무수행을 해야하는 공무원 신분으로 상정됐기 때문이다.

이에 청원경찰 해지 신청서 배포를 비롯, 노조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용자로 여겨왔던 조종사들을 노동자 계급으로서 이해하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생산, 사무, 문화, 예술, 서비스, 그 직종을 망라한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필수불가결한 문제이다.

노조운동은 지금가지 사회 전반의 진보·발전에 중심축 역할을 해왔고 특히 앞으로는 자회사에 국한되지 않고 외국기업, 정부 등 교섭상대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역할이 더욱 증대될 것으로 평가된다.

아직 한국의 노조들이 개척해야할 미지의 땅은 넓고도 넓다.

그 불모의 땅을 개척함과 더불어 노조 안에서조차 소회받는 계층까지 아우르는 운동이 진행될때, 사용자-노동자의 대립구도 안에서 노조는 대중의 지지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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