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교육받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꿈을 일구는 농부들이 있다.

언젠가 ‘인간평등’의 결실이 노랗게 익어 아름담게 출렁일 들판을 꿈꾸며 일하는 그들은 바로 노들장애인 야간학교(노들야학)사람들이다.

박경석씨는 이 노들야학이 설립된 93년 8월 운전 봉사부터 시작해 1년 후 평교사에서 지금의 교장직을 맡기까지 약 6년의 시간동아 이 들판을 가꿔 온 토박이 농부다.

“이곳은 국가의 책임 방기로 인해 빼앗긴 교육권을 찾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간이죠”라며 그는 노들야학이 단지 검정고시 합격을 위해 공부하는 곳이 아닌 장애인의 권리르 하나씩 찾아나기 위한 집단화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장애인 차별문제는 결코 장애인 개개인의 문제로만 소급해선 안됩니다.

이 역시 사회 구조적 문제로서 접근해야 합니다”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는 그도 대학 시절 행글라이더 주이 끊어지느 사고로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1급 장애인이다.

“사고 이후 5년 동안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이따금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 꼬마 애들이 쫓아오며 구경을 하곤 했죠” 사고 전에는 낙하산도 잘 타던 해병대 출신의 그가 그 때의 아픈 기억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건 장애인문제에 눈을 뜨게 한그간의 살의 역정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런지. “처음엔 장애인들에 대한그런 시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내 실수로 내가 다친 거니까 모두 내 탓이라고만 여겼죠”그러나 88년 서울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직업전산훈련을 받으면서 비로소 바깥 세상에 발을 내밀었다는 그, 거기서 딴 자격증을 가지고 취직을 해 보려 했지만 면접조차 보지 못하고 번번히 거절당했다는데, 이러한 장애인 고용차별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는 차츰 스스로 ‘장애’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감을 느꼈단다.

이런 그가 비장인 중심의 사회에 반기를 들게 된 결정적 사건이 서울 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이었다고.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들이 수영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산승리’라고 외치며 스타 장애인을 탄생시켰죠. 장애인의 사회적 삶을 보장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순전히 외국에 보여주기식 행사나 하고 있었던 겁니다”라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간다.

모든 장애인이 스티븐 호킹이나 손가락 넷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양 처럼 대단하지 않으며 장애인 중에도 사기꾼이나 범죄자가 있다고 말하는 그. 어느덧 윌는 장애인은 모두 순수하고 선한 존재니 무조건도와야 한다는 캠페인식 사고에 젖어 있었던 걸까? ‘마음의 장애가 더 큰 장애입니다’라며 비록 장애인은 몸은 불편해도 마음은 비장애인보다 순수하다고 장애인을 미화시키는 언론의 선전들이 결국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업는 장애인에 대한 또다른 편견을 낳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혹 선하지 않은 장애인을 발견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냉대를 보내고 있지나 않은지. 이에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 장애인들이 집단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조직화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그는 그 목표를 장애인 노동조합건설에 두고 있다.

이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의 문제와 그 안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장애인 노동자 차별문제까지 함께 아우르는 운동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은근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그의 모습에서 ‘평등 세상의 노란 들판’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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