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초대 총장·우리나라 최고의 여성지도자·한국 여성교육의 어머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 친일행위에 앞장선 반민족적 인사로 평가 받고 있는 김활란 박사. 최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 여성지도자에게 수여될 "우월 김활란상"제정을 두고 찬성과 반대논쟁이 뜨겁다.

그러나 여성교육부에서의 공적이나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정확한 내용과 근거를 알지 못하고 진행되는 논쟁들은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그의 일생에 관한 검토와 그것을 통한 재평가가 이뤄질 때만 "우월 김활란상" 제정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활란 박사는 지난 세기 뿌리 깊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여성교육을 통해 조국의 발전과 독립에 이바지 하겠다"는 목표로 유학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온 그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성의 가사 노동도 직업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여성도 적극적으로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그는 이화의 초대 총장으로서 여성이 빨리 사회에 진출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며 신문학과, 비서학과 등 다양한 전문 전공을 신설했다.

여러차례 재정적인 위기를 맞은 이화의 고비를 지켜내며 6·25 당시에도 천막학교를 지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여성교육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영자 신문인 「코리아 타임즈」를 만들어 외국에 한국을 홍보하고 전쟁 당시에는 자신의 집을 "필승각"이라 이름지어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골동품을 사들여 보존, 전시하는 등 외국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문화 외교관으로서도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의 이러한 삶에서 반민족적인 친일행위에 주목한다.

그는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야마키카즈란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또한 "이제야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국가를 위해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제야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신세대」, "우리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생도들은 황국의 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축전이라 감격하고 있다.

"「매일신보」등 일제의 요구대로 친일적인 글들을 기고했다.

뿐만 아니라 대외연설을 통해서도 징병제의 필요성 등에 대해 강연했다.

"애국금차회","조선부인문제연구회"등을 결성해 일제의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물적, 인적 지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감활란 박사는 70평생동안 조선 말기, 일제치하, 독재정권 등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물론 그 시대 봉건적 인습에 희생당하고 있던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그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공헌한 점, 세계적인 여성전문교육기관인 이화여대를 일구어낸 점 등 그 공로가 크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의 반민족적인 친일행위가 희석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행적의 한 단면으로 그의 모든것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무조건 숭배하는 편협한 사고가 아닌 그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를 평가할수 있어야 한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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