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특집] 5·18당시 가두방송 맡았던 「전옥주」씨를 만나 80년 5월의 광주. 그후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가노다 더 큰 망각의 폭으로, 기만적인 「화해」와 「용서」의 허울로 우리는 너무 쉽게 광주를 잊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88년 광주 청문회에서 5·18 이후 간첩으로 몰린 자신의 삶과 광주의 한을 진술하던 평범한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 있었다.

5·18 당시 가두방송으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 시민의 동참마을 호소했던 전옥주씨(46세).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갖다주다 간첩으로 몰린 아주머니, 자식의 죽음앞에 오열하던 광주의 어머니들이 계엄군의 총칼앞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죠. 거리로 나오다 온몸을 갈로 난자당한 학생들은 놈들의 트럭에 실려가고 나면 생사를 알길이 없었어요. 그걸 보고서는 평범한 무용강사로서 어떤 사상과 신념이 없던 나였지만 손을 놓고 앉아있을 수도, 무섭다고 집안에만 숨어 들 수도 없었어요』전씨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결코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그날을 회상한다.

전씨는 5월 18일이 되면 내장사에서 무덤조차 남아있지않은, 이름없는 5월 영령들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4년째 홀로 지내오고 있다 한다.

『정부에서는 5·18 사망자가 6백명이라고 우긴다지만, 실상은 2천명도 더 돼요. 광주에는 부랑인·고아가 꽤 많았는데 5·18이 지난후, 보호시설에서도 시내 어디에서도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항전 당시에도 가장 몸을 아끼지 않았고 끝까지 광주를 지켰던 사람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그 사람들 이름은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았죠』 가진자와 지식인, 정치인들이 서둘러 떠나버린 광주를 지킨 것은 더이상 잃을 것잉라곤 가난과 압박밖에없는 사람들, 독재권력과 계엄군의 폭압에 대해 생존권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었음을 전씨는 꼭 기억하자고 한다.

『당시 그들은 자신이 계엄군에 맞서 싸움으로써 그들이 이제껏 사회에서 소외되면서 가질 수 없었던 「자유·밥·행복」등을 갖게 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졌었죠. 그리고 그 때 가졌던 그들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그 때 바로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거 아니예요』 전씨는 5월의 광주가 이렇게 노동자·부랑인·학생 등 심한 지역차와 독점화된 경제구조·독재권력 아래 소외되고 고통받은 호남지역인이 하나돼 저항했던 자랑스런 「민중의 공동체」였음을 말한다.

『가두방송 하던 중 「내란선동죄」로 연행돼 갖은 고문을 당했는데, 야구방망이로 허리를 맞아 3년간 하혈을 했죠. 결국 놈들은 나를 간첩으로 몰아 10년형을 선고하더군요. 그 후 가족들이 나를 외면하고 난 너무 분하고 억울하나 마음에 죽으려고 감옥 녹슨 철창에 손목을 그어대기도 했어요』 1년 복역 후 가석방으로 출소한 전씨는 이때까지도 자신을 간첩으로 생각하는 가족곁에 차마 갈 수 없어 그 후 몇년을 서울 등지에서 행상을 하며 지냈단다.

『청문회 이후 광주의 진실이 일부 알려졌지만 철저한 진상규명이 광주문제 해결의 기본이라 생각돼요. 그것이 일워져야만 5월의 진정한 주역이 누구인지 5·18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도 올바르게 판단될 수 있을 겁니다』 전씨는 앞으로도 5월 영령을 위한 추모제를 해마다 지낼 것이란다.

또한 광주의 「또 하나의 묻혀진 진실」이 돼버린 「무덤없는 전사」등의 얘기를 책응로 펴낼 계획이 있단다.

자신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은 5·18. 그 안에서 함께 싸우다 죽어간 이웃들의 싸움과 죽음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간 이름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5·18의 또다른 의미를 느끼게 한다.

류혜인 기자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