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38일간의 살인적 단식 투쟁으로 감행한 바 있던 전해투는 여전히 원직복직을 위해 다시 간식에 들어간 것이다.
지난 11일(수) 여의도 뱍화점6층 전해투 단식농성장에서는 4명의 해고 노동자가 단식을 수행하고 있었다.
4월16일 단식을 결의하면서 삭발을 했던 머리카락이 이젠 새끼손가락 한디의 정도의 길이로 제법 자라있는 모습이 26일이라는 오랜 다식기간을 소리없이 웅변하고 있다.
『사실 단식농성은 자살 다음의 극한 투쟁방법이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결의한 것은 목숨을 걸고 해고노동자들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의지의 표현 입니다 』 담담한 표정으로 말문을 여는 전해투 위원장 조준호씨. 조씨는 전날각혈과 함께 혈다량이 18로 떨어져 쇼크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만 「단식중이라서 활발한 활동을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말할 뿐이다.
조용히 누워있거나 책을 보는 단식자들 사이를 왔다갔다 부지언히 수발을 들고 있는 김정호씨 역시 단식주이란다.
힐튼호텔에서 요리사로 근무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활동을 했던 김씨는 「상사폭행·기물파손」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92년 해고당했다.
해고무효소송 1심에서 패하고 2심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김씨는 사실 2심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법원도 상사목행·기물하손에 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인정하더구만. 그러면서도 이전의 무단조퇴·결근을 해고사유로 내세운 회사측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판결을 내리더군』법이란 결국「국가에 의해 법령으로 표시된 그 사회 지배세력으 의사」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해고무효소송에서 패하게 되면 김씨의 복직은 요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김씨는 윈직복직이 아닌 다른 곳 취직은 생각도 않고 있다.
『해고후 월수 2백으로 레스토랑에 취직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시장보러 시내만나가면 동료들이 무얼할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더라고』월급 2백만원보다 해고자로써 투쟁하면서 노조활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 할 수 있는 현재의 위치가 더 만족스럽다는 김씨의 말이다.
이처럼 결사적인 단식투쟁이 진행 중인 전해투 사무실 못지않게 밖에서도 해고노동자들의 뜨거운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9개 지역 40여개 사업장 곳곳에서 해고자들이 추근투쟁·철야텐트농성에 들어간것. 대우그룹 해고자 복직협회 의장 박종석씨도 인천 대우자동차 공장 앞에서 지역투쟁을 벌이는 사람중 하나이다.
박ㅆL는 91년 파업으로 구치소에 수감중일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가슴아픈 기억이 있다.
또한 장남이면서도 고향에 홀로계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 항상마음에 걸린다.
『회사측은 해고자들의 투쟁이 님투에 불을 붙일까봐 전전긍긍 하고 있어요.농성을 하려는 애고노동자 20여명에 노사협력부(일종의 구사대 격) 3백여명이 달려들어 텐트도 못치게 하니 어려움이 많지요』라고 말하는 박씨는 그러나 끈질긴 투쟁의 결과 복직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한다며 조심스런 희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문민정부가 해보고자 복직과 무슨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그러나 대부분의 해고 노동자들이 과거 공안통치 하으 기형적 정치질서 속에서 정당한 활동을 벌이다 해고된 이들이니만큼 진정한 문민정부라면 해고자 복직은 정권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해고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도 반응이 없는 자칭 문민정부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 전해투 편집부장 조수원씨의 말이다.
「공장 게시판 해고자명단에 내이름 석자가 콱 박히던 날/ 콰르르르-/내 인생은 무너져 버렸어」이 싯구처럼 노동자에게 해고는 사형선고와 같다.
히물며 그것이 부당해고임에야. 그러나 전해투는 시혜차원에서 베풀어지는 복직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까지 투쟁의 정당성을 온전히 인정받으며 당당히 일터로 동라가는 것. 그것만이 전해투 사람들의 소망이다.
이대학보
hakbo@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