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비축소-외로운 냉전의 땅 한반도에서의 의미<4> 반전반핵군축운동 성패 대중적 지지에 달려있어 (장유식 반핵평화운동연합 조직부장) 대중화를 모색하는 평화운동 80년대 중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데탕트와 군축의 뚜렷한 세계적 흐름과 함께 이제 남한(한반도_의 평화운동도 서서히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든 느낌이다.

수십년간 전사회를 짓눌러왔던 구사문화의 폐해속에서 일반대중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평화」의 문제는 86년부터 시작된 학원가의 반전 반핵 반미운동과 88년 이후 범국민적인 관심속에서 전개된 통일운동의 평화군축 투쟁, 또 88년 군산에서 있었던 미군만행 규탄 투쟁, 같은해 「제주도 송악산공군기지 설치 ㅏㅁ재투쟁」등을 통해 대중적 이수로 발전하였고, 더불어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었던 「핵발전소 건설 저지 투쟁」등이 전개되면서 수많은 성과를 거두어 온바 있다.

지난해에는 6월 15일 각계인사 3백 2명이 「한반도군축과 평화 통일을 위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한반도에도 본격적인 군축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90년7월27일 대학로에서 시민 학생 7백여명이 개최한 「평화군축 걷기대회」, 9원22일 인도주의실천을 위한 의사협의회등 보건의료 13개 단체에서 개최한 한반도의 반핵과 군축을 위한 보건의료인 대회등도 평화운동의 대중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예이다.

이처럼 남한 민중들의 투쟁과 각계의 노력에 힘입어 발전되어온 「평화운동」은 세계의 눈이 동북아와 한반도로 집중되고 있는 90년대를 맞아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전망이다.

특히 남한의 평화운동은 단지 생존에 대한 요구로서가 아니라 나라의 자주적 동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과 발맞추어 대중적인 운동을 요구받고 있다고 하겠다.

이글에서는 주로 91년에 있었던 평화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을 살펴보고 이후의 전망에 대해 약간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졌다.

걸프전과 반전운동 세계적인 평화무드를 무색케했던 미-이라크전쟁(걸프전쟁)이 지난해말부터 올초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의 관심의 촛점이 된바 있다.

남한의 평화운동 또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걸프전의 성격을 둘러싼 애매모호함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본격적인 대응은 실패라고 보여진다.

전민련·전대협은 전쟁초기 미국의 호전적인 정책에 제동을 거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대중적인 방식이 되지는 못했다.

이가운데서도 몇가지 의미있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첫번째는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었던 「반전대중강연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걸프전과 한국군 파병반대 어머니 모임」이었다.

「반전대중 강연회」는 2월 11일에 개최되었는데 보건의료단체,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걸프전의 비인간성, 반문명성, 반생명성」을 규탄하는 집회로 전개되었다.

이행사는 이후 걸프전이 조기종전됨에 따라 후속활동이 부진하였으나 금기시되어왔던 「반전」의 내용을 조직적으로 준비했다는 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걸프전과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어머니 모임」은 한국군파병이 본격 거론되는 시점에 태동하였으며 3월 12일 「걸프전쟁과 전쟁문화」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통해 전쟁의 폐해에 대해 고발하는 활동을 벌인 바 있다.

걸프전 종전 이후에는 단체의 명칭을 「평화를 갈망하는 어머니 모임」으로 바꾸고 지소적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어머니 모임」은 그야말로 대중적인 이해에 기초해 결성된 시민모임으로서 이후 활동이 주목된다고 하겠다.

한편 걸프전의 와중에서도 예년과 다름없이 진행된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한 반대운동이 학원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반대운동은 미대사관 등에 대한 점거나 타격의 형태로도 벌어졌으나 3월 22일 건국대에서는 약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중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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