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투성이…고 박창수 열사 의문사 부산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의 의문사와 정부의 강제부검 감행으로 이에 대한 분노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6일 한진중공업 노조와 전노협,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등은 「고 박창수위원장 옥중살인규탄 및 노동운동 탄압분쇄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9일 전국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대책위는 15일까지 진상규명, 책임자 구속처벌, 양심수 석방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짖 않을 경우 18일까지 전국 총파업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6일 박창수씨는 사망 이후 3백여명의 학생·노동자들은 경찰의 시신찰취를 저지하기 위해 경기도 안양병원으로 모여 영안실을 지켰다.

그러나 경찰은 7일 새벽 1천2백여명의 병력을 투입시켜 시신을 탈취했다.

대책위의 기길동씨는 『세상에 25cm 두께의 영안실벽을 쇠망치로 뚫고 들어오는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영안실에 모인 학생·노동자들이 새벽 5시부터 9시간동안 경찰들의 진입을 막는 도중 몇몇 노동자는 팔이 부러지고 동맥ㅇ르 끊고 3명이 실신하면서까지 『내 목숨 가져가도 시신에는 손 못 댄다』는 의지로 버텼으나 백골단을 앞세운 현정권은 이들 전원을 강제연행해 갔습니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한다.

또한 유가족들이 병원을 떠나지 않자 경찰은 8일 병원을 봉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하고 1백여명의 전경을 배치시켰다.

박씨는 지난 2월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박씨는 강경대열사의 죽음 이후 「살인·폭력정권」에 대한 투쟁속에 단식투쟁을 전개해왔다.

구치소측은 『박씨가 격렬하게 배구시합을 하던 중 이마에 부상을 입어 입원했다』고 밝혔으나 단식중이었던 박씨가 어떻게 격렬하게 운동을 했는지 그 자체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박열사의 부인 박기선씨는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도 그분은 「열사보다 하나라고 더 살아남아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자살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유서 한장 안남기고 갈 그럴 분이 결코 아닙니다.

앞으로 남편을 죽인 이정권에 맞서 그 분 뜻을 따라 싸울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애써 슬픔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찰측은 병원옥상에서 투신한 것을 사인으로 발표했으나 사체가 반듯하게 누워있는 점과 발목골절 외에 타박상이 없는 점, 링겔병을 옥상까지 들고 올라가 병을 들고 투신한 것등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경찰이 강제로 시신을 탈취, 사인을 은폐하려는 것을 볼 때 『구치소내에서 폭행하고 병원에서 사망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투신자살로 위ㅈ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어나고 있다.

생전에 박씨는 87년 노동자 대투쟁때 노동운동가로 나선 이후 90년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90년에는 부산지역 노조총연합 부의장으로 활동한 모범적인 운동가였다.

조합활동이 없는 날에는 6살난 아들 용찬과 4살박이 딸 예란과 함께 뒷산에라도 올라가 놀아줄 만큼 자상한 아빠이기도 했다.

고 박창수 열사의 죽음. 박씨가 대우조선파업에 지원결의를 했다고 하여 연행한 자체가 불법적이었던 만큼 이 죽음의 시초는 현정권의 강압적인 노동운동탄압의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정권의 무모한 탄압은 짓밟혀 침묵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강철의 노동자」를 만들어내는것이다.

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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