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투쟁 강고한 민중연대로 승리예고 9일 국민대회 현장스케치 노동자·학생, 총파업 동맹휴업 힘차게 전개 「노태우학정 3년, 민자당 독재 1년」이라는 91년 5월 9일(목) 전국에서는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종식을 위한 국민대회」(이하 국민대회)가 강행되어 본격적인 「노정권퇴진 총력투쟁」이 선전포고를 울렸다.

시위인파 50여만명이라는 6공들어 최대의 규모를 보인 9일 국민대회는 단지 살인통치를 자행하는 민자당 해체만을 주장하는 장은 아니었다.

이는 91년 상반기부터 뇌물외유, 수서, 페놀오염으로 민중생존을 파탄하고 민족민주운동세력에 대한 각개격파를 행해온 정권에 대해 불만이 증폭되어 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강경대군 타살」사건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켜, 이제 4천만 민중과 학생들은 「대책회의」를 구심으로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날, 학생·노동자들은 전국 1백45개 대학의 동맹휴업, 전국 1백여개 작업장의 총파업을 결의, 5.9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투쟁의 파고를 높였다.

서울의 국민대회는 오후 6시경 사회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종로, 을지로, 남대문 등 곳곳에서 벌인 도심진출 거리시위가 시발점이 되었다.

이어 6시 20분경 종로 3·4가에 모인 시위대 4만여명은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치며 종각을 거쳐 세종로 쪽으로 행진을 벌였으나 전경이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여 강력저지하자 돌과 화염병 등을 던지며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평화행진 도중 최루탄이 발사되자 도로변 시민들은 『쏘지마! 학생들을 죽일 셈이냐』고 격렬히 항의하기도 했다.

오후 7시 30분께는 퇴근하던 시민드로 가세, 종로 1~4가 8차선도로가 전부 인파로 메워져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7시 40분경에는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전경들이 무장해체를 당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8시 30분경부터 을지로를 거쳐 명동으로 이동, 밤 11시까지 서울역 등지에서 시위를 계속했으며, 전대협 소속 학생 1백여명은 명동성당에 들어가 구국농성에 돌입했다.

9일 국민대회의 모습 ◇국민대회 참가자 중에는 다른 때와 달리 「넥타이 부대」가 많아 이채를 띄었다.

대부분 30대의 직장인인 이들은 오후 6시 30분경 종로 2가에서 『애국시민 일어섰다.

노태우는 각오하라!』며 스크럼을 짜고 합류하여 시위대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국민대회는 서노협소속 문화패 등 풍물패가 대거 참여, 흥겨운 북소리로 시위대를 고무시켰다.

이들은 자욱한 최루탄 속에서도 북채를 놓지 않고 「선봉」을 지키는 의연함을 보였다.

◇서울역 앞 시위에서는 중학교 교사 10여명이 강경대군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자 검은양복을 입고 참여했으며 오후 7시 20분경 종로에는 「전진하는 고등학생」이란 피켓을 든 고등학생 50여명이 『쟁취 참교육, 타도 노태우』를 외쳐 시민·학생·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한편 이날은 시민들의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격려지원 역시 두드러졌다.

오후 10시경 남대문 노점상 아주머니들은 지쳐하는 시위대를 위해 큰 함지박에 물을 담아 나눠주며 『학생들 빨리 마시고 힘내서 투쟁 계속 해야지!』하고 채근하기도 했다.

국민대회를 정리하며 5.9 투쟁은 기간 고립분산적이었던 투쟁에서 탈피, 「강경대군틔 사회적 타살」을 고발하고, 이제 강고한 민중연대를 통한, 단일한 대오로 노정권의 입지를 격파해 들어가는 투쟁의 「촉발제」로서 상정되었다.

이는 전노협이 전대협의 동맹휴업과 함께 총파업을 결의, 9일(목)~18일(토)을 총력투쟁기간으로 상정, 투쟁을 함께 하기로 결의한데서 확인된다.

이제 노학연대는 5.9투쟁 이후 일상적 연대의 구축으로 역동적으로 정세를 열어갈 주된 동력이 될 것이다.

이는 11일 「고 박창수위원장 옥중살인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규탄과 노태우 정권퇴진결의대회」의 투쟁일정 속에서 다시 한 번 검증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5.9 투쟁은 노학연대, 나아가 민중의 연대라는 보다 넓어진 운동 공간 속에서 지속적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담보, 현정세를 승리로 이끌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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