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껍질을 벗고 새싹을 틔우는 교내에 「실천하지 않는 지성」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폭등하는 물가와 노조간부고속, 수서비리 은폐하는 기초의회분리선거라는 학교밖문제는 접어두고라도 서강대 2천여 경찰병력의 학원침탈, 이귀혜 21대총학생회장 구속등의 학내문제에도 별다른 대응을 못하는 현실에 반성하며 음·미대 학생회는 1만 5천 이화인에게 「정치토론회」를 제안했다.

8일 열린 이 토론회는 총학생회 사회부원 황우영양(교공·4)과 민중당청년학생위원장 황동미양(외교·4)의 기조발제와 참석한 학생들의 질문과 자유토론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황우영양은 『요즘 학생들 사이에는 학생회가 정치편향이어서 학생들과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극소수나마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회가 학생들의 이해와 요구에 배치되는 투쟁을 하여서, 혹은 지나치게 과격한 투쟁을 하여서 분리되는 현상을 보이는것은 아닙니다.

이런 학생회의 모습 또한 자체모순이라기 보다는 형정세속에서 규정받는 것』이라며 『이는 87년 전두환 정권 독재타도때 이화광장을 가득 메웠던 학생회를 분리시키는 것은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었다며, 원인은 학원침탈과 학생회 간부구속등의 사건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학생들, 수서비리 규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모아내지 못한 학생회 간부의 무능속에 있습니다』라고 지적한다.

이 토론회에서는 뇌물외유사건, 부정입시, 수서비리, 기초의회분리선거, 페놀방류로 인한 공해문제등 각각의 하루가 다르게 계속 발생하는 사안들은 개별의 사건이 아닌 하나의 맥락하에 진행되는 것임이 논의되었다.

87년 6월 범국민 반5공투쟁과 7·8·9월 노동자 투쟁속에 국민들의 민주화열기는 높아만갔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권은 「6.29선언」으로 대응했으며, 안정ㅇ적으로 6공으로 이행했다.

이후 여소야대국면에 정권은 다소 어려움을 겪었으나 89년말 야당과 지방자치제실시를 약속함으로써 광주문제의 조속청산을 이뤄냈다.

그리고 90년 보다 안정적인 구도인, 거대여당 「민자당」으로 출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민주화투쟁은 89년 전교조, 90년 전노협을 탄생시켰으며, 급기야는 모든 기층조직을 망라하는 국민연합을 이뤄냈다.

또한 KBS투쟁을 비롯하여 현대중공업 파업은 민주화열기를 돋우었다.

그러는 속에 정권은 안정적인 집권을위해 임시국회에서 많은 악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국민의 불만이 높아가는 가운데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이 촉로되자 야당마저 장외투쟁으로 대응했으나, 야당은 12월 지자제 실시로 다시 정권과 타협하였다.

91년 수서비리무마를 위한 기초의회선거는 분리 실시되었으며, 속적 속결속에 민자당후보의 70%이상 당선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지자제선거동안 모든 집회·시위는 불법화되었고, 대우조선 노조간부는 구속되고 학생회는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지하조직으로 왜곡되었다.

이러한 현 정치정세를 이번 토론회에서는 「민중운동탄압과 보수야당 견인을 통한 정권의 안정적 재집권을 위한 토대구축기」로 규정하고, 폭로할 것을 결의했다.

황동미양은 『광역선거라는 유의미한 공간을 방기해서는 안됨』을 지적하며, 적극참여를 제시했다.

그러나 자유토론순서에서 이현자양(사학·3)은 『준비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방기한 미래』를 우려하며 『지금의 임투와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잘 대응해내지 못한다면, 기초의회처럼 선거운동도 거의 금지되는 공안선거가 될수있음』을 지적하며 현 정세를 즉각 폭로·대응할 「대책위」를 제안하였다.

이날 학생들은 암울한 학내분위기를 딛고 과토론회등을 통한 활발한 정치토론의 진행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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