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지구특혜분양사건」을 규탄하는 집회와 가두시위가 연일거리를 메우고 있는 가운데 치안본부는 개강을 맞아 확산될 시위에 대한 예방조처로 2월 28일(목) 고려대·한양대등 7개대학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경찰은 학생 65명을 연행하고 트럭 8대분의 시위용품을 압수했다.

이외에도 정부는 일부 대학생들의 화염병 투척행위를 테러로 간주, 「ㅇㅇ파」로 규정지어 범죄단체 조직죄를 적용하기로 하는 한편 재야인사와 학생등 7백 68명을 사찰하고 있다.

89년 공안정국 형성 이후,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탄압의 칼날이 이제 학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학원에 대한 탄압은 비록겉모습은 우발적이고 돌출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나 그 내막ㆀㅡㄹ 살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던 필연적인 현상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92,3년의 선거정국, 즉 권력재편기를 앞두고 안정적인 권력재창출의 결정적인 장애물인 민족민주운동 세력(이하 민민운)을 「거세」하지 않는 한 앞으로의 2년을 곱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92,3년의 선거관정에서 내각제 개헌과 김영삼­김대중 양립구도를 축으로 하는 제도정치권의 재편을 관철시키고자하는 권력 핵심부의 입장에선 그들의 「염원」을 이룰 수 있느 ㄴ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한가지 방법은 보다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정치민주화 조치와 민중들의 생존권 요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대다수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 안보」를 정권유지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상정하고 있는 현정부의 입장에서 이같은 조치는 자신들의 「무장해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금권과 판권을 동원한 「날치기」정권 재창출밖에 없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전에 민민운을 거세해야만 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87년 6·29선언이 갖는 의미는 부분적인 개량전술로 중산층을 「포섭」, 6공의 안정적인 정권기반을 구축함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보수­혁신구도를 창출, 일당 독재체제를 갖추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군부독재정부를 친미보수민간정부로 대체, 식민지 체제의 안정화를 꾀히ㅏ려는 미국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미국과 정부가 이같은 구상아래 6·29선언을 내놓았던 배경은 첫째, 당시 범국민민주역량이 정부의통치력을 압도, 더이상 쿠데타와 같은 폭력적방법으로 위기국면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둘째, 3저호황 덕분에 각계각층의 생존권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돈」이 축적돼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정부의 이같은 구상은 88년 들어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88년 4월 총선결과는 6·29선언정도의 민주화로는 국민들의 민주화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었고 좀더 대폭적이고 근본적인 민주화조치 없이는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더욱 가열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각인케 했다.

그러나 노정권은 더이상의 민주화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당시 민주화요구의 중심내용이 5공청산이었던 바 5공비리의 주범인 노대통령의 입장에서 좀더 강경한 6공청산은 곧 자신의 목을 죄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경제사정에 있었다.

3저호황으로 유례없는 번성기를 맞았던 한국경제가 88년을 기점으로 3저체제가 붕괴되고 주요수출국인 서방선진국의 무역장벽이 두터워 지면서 급격히 침체국면으로 돌아선 것이다.

노동운동세력(이하 노운)의 임금인상투쟁, 농민들의 추곡수매가 투쟁이 날이 갈수록 가열되는 판에 3저호황이 3고불황으로 돌게되자 정권의 가장 중요한 기반인 재벌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재벌들은 한편으로는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 민중의 생존권투쟁을 강력히 탄압할 것을 요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설비재투자보다는 「장사」가 훨씬 손쉬운 투기로 돈을 벌려고 한 것이다.

89년 공안정국의 등장은 88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화된 정치­경제상황에서 노정권의 대응력이 한게에 봉착했음을 입증한 것이었다.

개량전술을 사용하기에는 더이상 「돈」도 민주화 의지도 없음을 드러낸 것이었고 오로지 유일한 살길은 탄압의 칼날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었다.

공안정국 형성이후 노정권이 취한 조치는 우선 노운에 대한 「싹쓸이」였다.

노정권이 학원에 대해서는 비교적 느슨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노운에는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한 이유는, 한국경제의 재건을 위해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노운을 먼저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해방 이우 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투쟁의 성지로 자리잡아온 학원을 대대적으로 탄압할 경우 자신들의 수구반동적 본질을 극명히 표출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했기때문이다.

노정권은 노동자에게는 탄압을 학원과 중산층에는 개량을 보이는 분할 통치를 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또한 여의치 않았다.

재벌들의투기로 전·월세값 폭등, 주가폭락, 물가앙등등이 초래돼 중산층의 거센저항을 몰고 온데다가 3당통합이후 계속되는 실정으로 범국민적인 반민자당투쟁이 학원의 선도로 열기를 더해갔기 때문이다.

노정권은 때마침 터진 걸프전을 활용, 경제위기설을 유포, 국민통합을 꾀하려했지만 걸프전이 예상외로 조기종전된데다가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 또한 미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특히 노정권은 한국자본의 부패성과 정경유착의 상징인 수서사건이 터져 치유불능의 타격을 받음으로써 분할통치마처 포기하고 유신과 5공시대에 횡행했던 「대국민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구나 앞서 밝힌 바 있듯이 92,3년의 선거정국에서 안정적 지배체제구축을 위한 권력재편을 이루려는 노정권의 입장에서 수서사건은 민중생존권투쟁, 그리고 지자제 선거와 맞물릴 경우 제 2의 6월항쟁을 불러올지도 모를 「화약고」로, 모든 투쟁의 진원지인 민민운을 「사전제압」하지 않을 경우 권력재편은 관두고서라도 현상유지조차도 힘든 중대사건임에 분명했다.

결국 최근 학원데 대한 탄압은 범국민 민주화투쟁의 「돌격대」인 학원이 수서사건을 매개로 투쟁을 격화시킬 것을 사전에 봉쇄, 운신의 폭을 좁혀놓겠다는 구도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수서」사건이 돌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학원에 대한 탄압은 가시화 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12.27개각에서 친위인물을 청와대와 행정부에 다수 포진시킨 것은 92,3년의 전초전이 될 올정국에서 폭력을 동원, 기선을 제압하여 민중진영은 물론 모든 민족민주진영을 압살하겠다는 의도였으며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점만 남아있었다.

수서사건의 돌춤은 노정권의 구상을 시기를 앞당겨 현실화시키는데 촉진데 역할을 하는 조건일 뿐이며 민민운탄압의 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노정권의 이 같은 구상은 일면으로는 신장하고 있는 민중역략을 이기회에 초토화하여 체제불안의 싹을 아예 도려내겠다는 의지이며, 또 한면으로는 학원과중산층까지 겨냥한 탄압을 통해 공포분위기를 조성, 「잔잔한」선거를 치뤄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원을 비롯한 민민운에 대한 탄압은 일시적,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대대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노정권의 구상은 정권파탄을 담보로한 도박의 성격을 갖는다.

지난 2년동안 전개돼온 물가앙등, 공안통치등으로 중산층까지 포함한 전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해있는데다 앞으로의 선거과정에서 뿌려질 천문학적 숫자의 선거자금이 민생파탄을 초래, 제 2의 6월항쟁을 불러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벌과 제도폭력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수서비리와 민민지영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국민의 공분을 유신과 5공정권에 버금가는 것으로 끌어올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화살은 시위를떠났고 노정권과 국민의 전쟁은 시작됐다.

이 시점에서 학원을 비롯한 민민운이 할수있는 것은 정권탄압에 전면대응하는것이며 그 방법은 오로지 범민주진영의 결속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서」사건은 그간 흩어져있던 민민운세력을 하나로 응집, 반민자당공동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이다.

「수서비리」투쟁은 올봄 가열화될 민중생존권투쟁의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노정권의 탄압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범민주진영의 중요한 구축으로 다가올 92,3년의 일대접전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열쇠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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