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현진 열사의 군의문사, 그리고 매년 은폐,왜곡된 채로 발생하고 있는 8백여명의 군사망원인. 이들의 죽음은 우리의 군대가 외세와 독재군력의 안정적 집권유지를 위해 독점되면서 발생한 부산물에 다름아니다.

또한 해방후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이데로로기억압의 보루로써 작용한 군은 그 명예실추는 물론이고 민족사에 용서받을 수 없는 위치로 전락되었다.

더욱이 금요일을 전후한 주말의 사망과 「비관자살」이라는 사망통지서는 이땅의 민주와 자주를 위해 헌신하는 청년학도들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른 현 시기 우리의 민족민주운동(이하 민민운)의 수준은 「군의 민주화」라는 요구를 가능케하고 있다.

(본 공동기자단은 군전문가들과 토론회를 거치면서 「군의 중립화」와 「군의 민주화」를 놓고 「군의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중립적일 수 없고 당파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민중의 편에서 민중의 군대를 지향하며 학우들에게 「자기문제」라는 접근을 더욱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군의 민주화」라는 어휘가 더욱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국 대학신문 기자연합은 현 정세를 민민운 세력이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이라는 고민의 맥락에서 남현진 열사의 군의문사에 대한 현 제도언론의 보도의 한계를 다시금 절감하고 「남현진열사 군의문사 진상규명 및 군민주화를 위한 전구개ㄷ학신문기자 연합 공동기자단」을 구성하여 본원고 제작및 배포, 기획광고제작등의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본 기획은 군의문사를 「사건화」「현상화」시키는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청년학도들에게 남현진열사의 「군의문사」를 계기점으로 삼아 보다 총체화된 사회인식으로 군민주화를 인식,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내가 삼남매를 낳았는데 와 둘뿐이고! 우리 현진이는 어데갔노. 우리아들 현진이 어데갔노. 우리 아들 현진이를 어서 살려내라, 살려내! 현진아! 현진아…」 죽은 남현진군의 어머님은 아들의 시신이 땅속에 묻히려는 데에 오열하며, 이를 막고 관위의 태극기에 얼굴을 묻고는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남현진군의 친형 남준진씨도 무겁게 다물린 검은 관위에 흙을 뿌리기 위해 부여 잡은 삽자루를 움직일줄 모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조국강변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에미 가슴에 묻는다고 안합니까? 그런데 이놈은 에미 가슴만 아니라 군데는 무서운 곳이라고 아예 말뚝을 치고가네 그려』 장례식에 왔던 조문객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만 찼다.

이는 지난 26일 저녁 6시 장지◆ 모란공원에서 가진 남현진(한국외국어대생)군의 장례식 한장면이다.

이 장례식에서 입관된 남현진군의 군의문사가 알려진 것은 입대 70여일만인 지난 2월 3일, 소나무에 목매단 그의 변사체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군입대후 논산에서 훈련 마치고 가족을 면회할 때 여유있고 활발했던 현진이였는데, 자기 키만한 소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을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애가 무슨 생각을 갖고 죽기 4시간 전에 감기약을 타먹었는지 정말 이해 안갑니다』 『혼자 먹을 수 없는 빵과 두유를 갖고 화장실도 맘대로 못가는 신병이 훈련과 근무시간에 혼자 산속으로 들어갈갈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상위계급자와의 약속이나 명령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건현장에 대한 검증을 마친 사람들이 제기한 의문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살」이라고 볼 수 있는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정확한 사인은 「질식사」라고 발표한 군당국의 잘짜여진 각본에도 불구하고 남군의 죽음은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편 현재까지 남군이 죽기얼마전인 1월 14일부터 24일까지의 행동이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실제 1월 24일 이후 남현진군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한다.

굳은 얼굴에 마치 무슨일이 있던 것 같다는 동료의 증언, 「아무말이나 쓸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내 마음을 네가 유추해석해야만 한다」는 문귀와 함께 심리적 불안이 가득한 상태의 편지내용은 뭔가 그에게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자신을 엄습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총학생회 기획 2부장, 89년 전대협 한라선봉대 용성총련 대표등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남현진군에게 프락치활동을 강요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간군에 의해 속출한 무수한 군의문사를 돌이켜보면 너무도 자명해진다.

88년 10월 5일 국방부감사 자료에 의하면 88년 이후 군부 대안의 군기사고 사망중 자살이 2천 2백 54명이며 연간 군부대 안의 사망인원은 8백여명에 이르고 있다.

「내자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군대에 보내지 않을껴. 군대가서 죽느니 차라리 감방을 보내지 군대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알아」라고 탄식하시는 유가족협회소속 김씨의 마음은 바로 우리들, 부모님의 심정인 것이다.

또한 군대에서 죽어간 이들의 사인은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사인이 은페되어 교묘하게 자살 등으로 위장되어 있을뿐 아니라 분명한 물증, 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이라는 거대한 위력 앞에서 사건들은 역사속에 꼼짝없이 사장되어온 것은 관례화(?)되어온 것이다.

「군당국에서는 원근이가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을 쏘았다가 죽지않자 다음에는 왼쪽에 쐈다고 합니다.

그래도 죽지않자 마지막으로 머리에 쏘고 죽었다는 얘기를 하니 누가 믿으려 합니까?」 학생운동과 관련이 없으나 머리 양가슴에 M­16소총 3발이 박힌채 「자살」했다는 허원근(일병, 84. 4. 2 부산 수산대) 부친의 말이다.

「교내 시위현장에서 연행, 강제 입영되었다가 군대에서 변사체로 발견」 「군에서 녹화사업으로 고문수사 받음. 가슴에 3발의 총탄자욱을 남긴채 사망」 「보안사 요원으로 학원프락치 노릇을 강요받다 목졸린 변사체로 발견」 「대통령 주재자 투표시 야당후포에게 투표 구타로 사망」 「상관에게 보약상납을 강요받다 불에 탄채로 발견」 「급히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귀대한 후 실종, 음독자살이라고 발표되었으나 목졸린 흔적과 칼에 의한 상흔」 5·6공화국하에서 발생한 군대 의문사 사건상황 중에서 몇가지 요약한 것이다.

『군과 군인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해요. 군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사회구조적제도인것이고 군인은 일종의 제도에 복구하고 있는 다수 민중들을 뜻하는 것입니다』라고 KNCC인권위원회에서 양심선언을 한 연성흠(일병, 88. 1. 28)씨가 밝힌 것처럼 현재 남한의 군인은 민중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장치된 군복무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혁노맹, 사노맹, 민통, 전민학련 등의 조직사건에 군인다수가 연류되고 있다.

게다가 그드라에게는 사회와 동떨어진 군대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인간임을 무시당한 채 온갖 고문과 조작수사가 자행된 것으로 보이며 군법까지 추가되어 형량이 가중되고 있다 한다.

때문에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실부로 군을 이용하여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는 것은 그리 무리한 추측만은 아닐 것이다.

『설사 군에 징집된 젊은 대학생들이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군이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문제는 그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사건의 본질속에서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남현진 군입대 의문사 진상규면 대책위원회」의 이영록 장례 집행위원장은 말한다.

아직도 남현진군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남현진 그는 이미 종전의 역사속에서 은폐되어진 「군의문사」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또다시 오늘 제2의 남현진 송종호(서울대 서문87학번)씨가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책상과 창틀 상이에 앉아 목이 끼여 죽은 상태­에서. 그리고 내일이 되면 제3의 남현진, 어쩌면 내가 될수 있는 이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앞에 나타날 것이다.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공동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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