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전통」무시한 개혁정책 실패

아프리카 민족주의 건설의 기수 1962년 독립이래 비동맹 독자외교, 아프리카 민족주의 건설의 기수를 자처해 온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는 요즘 지중해 햇살만큼이나 뜨거운 정치 및 사회변화의 계절을 맞고 있다.

일당 사회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일명 「샤들리스트로이카」라 불리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샤들리 벤제디드 현 대통령 정권이 지난 6월에 실시된 지역선거에서의 참패에서부터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현실 정치 무대에서 소외됐던 이슬람교 원리주의자들(Islam Fundamentalist)이 압승을 거둬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으로 부상한 것이 알제리 정치변화의 방향을 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알제리가 갖고 있는 정치·사회·문화·종교적 토양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알제리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바탕하에 앤크루마식의 세속적 아프리카적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했지만 인구 90%가 이슬람교도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탄생 초기 반제·반봉건·반외세의 지도이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년간의 생활관습과 그것으로 연결되는 주변 마그레브국가들과의 밀착성 등의 무시는 벤제디드 대통령의 통속적 개념에 입각한 개혁정책에 분명한 한계를 긋고 있다.

현재의 변화무쌍함을 파악하기에 앞서 간략하나마 알제리의 역사를 살펴보는게 오늘날 알제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알제리는 1830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던 중 같은 해 프랑스의 침략으로 그뒤 줄곧 1백 30여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1백여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알제리인들은 피나는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

드디어 1954년에는 전민족주의자들이 결집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됐으며, 58년에는 카이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알제리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세계 여론(특히 아프리카 각국의 잇따른 독립쟁취)에 밀린 프랑스는 62년 알제리의 독립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63년 6월엔 대통령제 헌법을 제정하고 민족해방전선(FLN)을 유일당으로 한 벤 벨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뒤 부메디언이 쿠데타로 집권하다 79년 2월 벤제디드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 오늘에 이르고 있다.

FLN 은 집권뒤 일당지배 체제를 유지해 왔으며, 엄격한 정치·종교분리에 의거, 아프리카적 사회주의 건설에 힘썼다.

즉 부족적 전통 문화와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여 생산성 재고보다는 분배정의에 초점을 맞춘 혼합된 사회주의가 그들의 목표였다.

여기에다가 비동맹 중립 외교도 주요 정책중의 하나였다.

88년 식량폭동이 개혁의 동인 그러나 원시적 생산구조의 발전단계를 뛰어넘은 통제형 사회주의는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더구나 서방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는 엄청난 양에 이르는 원유수출로 인한 수입으로써도 버릴 수 없는 경제 악화에 결정적 동인이 됐다.

(예 : 연 실업률이 30%에 달함) 통제경제에 따른 낮은 생산성 및 산업 기술의 낙후, 원유가 하락이 빚은 국제 수지 악화, 분배위주의 경제구조가 낳은 생필품난, 엄청난 물가고 등은 동구에서 (특히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개혁바람이 지중해로 건너오기 전에 이미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88년 10월, 2백명의 희생자를 낸 식량폭동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벤제디드 정권은 이에 따라 일당 지배 포기, 헌법에서 사회주의규정 삭제, 회교원리주의 정당을 포괄한 복수정당제 인정, 언론에 대한 정부 지배 포기 등의 혁신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드디어 89년 2월에는 헌법개정에 따라 알제리 사상 최초로 다당제가 도입됐으며, 뒤이어 이슬람구국전선(FIS) 등 20개 정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지난 6월 12일에 실시된 48개 지역자치선거에서 FIS가 32곳을 석권, 벤제디드 정권은 자신들의 노선을 수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풍부한 천연 자원과 노동력, 높은 교육수준 등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내핍만을 요구하는 정부에 실망한 나머지 국민들은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선거결과에 승복한 벤제디드 정권은 FIS 등의 압력에 굴복, 당초 92년에 예정된 총선을 91년 상반기로 앞당기기로 했으며 회교원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정책결정에 대폭 수용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술집·디스코텍 영업금지 등 전통 회복 실제로 알제리와 콘스탄틴 제의회는 남녀공학제도를 폐지했으며 주류판매의 금지도 결정했다.

물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밖에 관광지로 유명한 역사적 도시 타라사시 의회도 여성들의 수영장 출입금지와 술집, 디스코텍 등의 영업금지를 결의했다.

어떻게 보면 유치단계에 접어들었던 개혁조치와 민주화과정이 후퇴한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알제리인들의 선택은 결코 사회주의 포기나 개방·개혁조치와도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랍과 아프리카 이슬람교 국가들에 불고있는 「이슬람 정신 회복」과 「자신의 뿌리찾기」-이것은 최근 들어 서방제국들이 새로운 형태로 전개하고 있는 신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함-의 대열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제악화로 인한 불만은 단지 이러한 정신회복운동을 가속화시킨 것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알 하티시 알제대학의 국제정치교수는 진단하고 있다.

차기집권자로 유력시되는 FIS의 지도자인 세이크 압바스 마다니도 『알제리는 정치·경제상 벤제디드의 개혁정책을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도 이슬람의 전통을 가미시키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야만 알제리는 살아남을 수 있고 제2의 식민지화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샤들이스트로이카는 과거 전통주의에서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국가(예 : 이란, 이라크, 요르단 등)로 이행하고 가교역할의 구심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개혁정책에 대한 성공여부를 ㄸK지는 것은 별 실익이 없으며 오히려 이슬람국가로서의 변화에 대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알제리를 이해하는데 유익하리라 본다.

다만 향후 2년내에 70억달러라는 외채를 변제해야하는 등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성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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