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기독교학과 교수) 저는 처음부터 총장님으로 선생님을 알고 만났습니다.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김활란 선생님을 모시고 뉴욕 공항에 어느 깊은 밤 피곤한 모습으로 도착하신 선생님을 신학생으로 처음 뵈었습니다.

40대초반의 선생님의 인상은 강했고 근엄하셨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망설이던 저에게 보내신 짧은 편지, 작은 종이에 흑판 글씨만한 힘찬 글씨로 즉시 귀국해서 기독교학과 과장직을 맡으라는 「명령서」는 엄격하고 직설적이었습니다.

귀국인사와 취임 인사를 드리는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단 한마디 말씀, 『앞으로 고생많이 할꺼에요』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참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혁명적인데가 있었지만, 대단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이 서기만하면 결단을 내리시고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화의 전통과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원칙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셨습니다.

선생님은 혁명적인 동지애를 가지고 계십니다.

참된 동지를 배신하지 않으시고, 배신하신 동지를 불쌍히 보시지만 준엄하셨습니다.

모든 원칙론자들이 그런 것처럼, 산셍님은 이상주의자 셨고, 이상주의자가 가지는 혁명가의 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항상 마음이 젊으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꿈을 꺾지 않으시고 꿈을 키워 주시고 꿈꾸는 이들과 함께 젊은 날의 꿈을 꾸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고난 당하는 이들과는 먼제 자리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정치범들의 슬퍼하고 아파하는 가족들을 찾아나섰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가 붙들린 우리과 학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벌벌떠는 과장인 저를 대동하시고 공장 사장을 만나러 가셨던 길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학생들과 함께 대강당에 좌정하시고 한밤을 꼬박 세우셨습니다.

선생님댁과 저희 집은 정치적 피신이 필요한 학생들의 피난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교수 자격이 없다고 해직시키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으시고도 불복종하신 분이시고 제 「목」을 살리신 그 일을 무덤으로까지 침묵하시는 것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못내 해직 당하고 말았지만, 덕분에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목사되었다고 기뻐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나라의 양심적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지성이라는말이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좀 어수룩 해도 성실한 사람, 노력하는 사람이 더 믿음직 스럽다고 하시면서 「반지성적」인 태도 같은 것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예리한 지성을 저는 존경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께서 신학자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예리한 신학적인 예지를 가지고 판단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자유신학자나 신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신앙은 열려있었습니다.

신앙적 열광주의를 비판하셨으이 신앙의 열정을 친창하셨습니다.

이상과 이념을 높시 샀지만 폐쇄적이고 절대화된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배격하셨고 인간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약설하셨습니다.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은 모른다고 하시면서 가난하고 사랑을 나누라는 말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형식주의, 성직주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교리와 도그마를 뛰어넘는 종교의 진리와 실천을 추구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거짓말정이들이야.거짓말 안하고는 목사가 될 수 없어…』가끔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학문적으로 종교적 언어의 허구성을 오래 연구한 사람입니다.

저는 학문적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을 아직도 되새기고 선생님의 종교적 차원을 깊이 헤아리면서 선생님을 평생토록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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