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관절인형으로 사람의 움직임 재현…성적 상품화 우려도
예전에는 ‘인형’이라 하면 곰인형이나 조그만 바비인형 정도의 유아기 놀이기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21세기의 인형은 조각·공예·사진예술 등과 결합하면서 성인까지 즐기는 종합문화산업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구체관절인형은 90년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이래 진짜 사람 같은 움직임과 실감나는 표정으로 현재까지 10만명이 넘는 매니아를 끌어들이고 있다.
팔·다리·손가락 등의 관절부위에 10개~33개의 공이 들어가 있어 이름이 ‘구체관절’인 이 인형은 온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11일(화)~23일(일) 홍대 앞 쌤쌤 쌈지 회관에서는 ‘구체관절인형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곳에서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스타워즈’의 아미달라 여왕 등 유명 영화·동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관절인형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모두 인형제작·연출 모임 ‘가문비동화’ 회원들이 모여 재현해낸 것이다.
이 전시회를 관람한 오세정(25세)씨는 “구체관절인형을 처음 봤는데 인형이 정말 사람같은 표정과 몸짓을 한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인형이 진화하면서 인형을 즐기는 층도 예전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어린이는 물론이고 남자 대학생·여성 직장인·60대 전문직 종사자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구체관절인형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또 인형을 즐기는 문화는 디지털 카메라와 블로그의 유행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
예쁘게 찍은 인형의 사진을 인형 동호회 게시판이나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매니아들의 빼놓을 수 없는 취미가 됐다.
자유롭게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구체관절인형은 다양한 포즈가 가능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재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인형문화에서 주목할 점은 인형과 노는 사람 대부분이 ‘성인’이라는 것이다.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 인형의 주소비자가 된 것을 통해 인형이 주는 의미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김지원(26세)씨는 “저에게 ‘우리 아이’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에요.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갈수록 정도 더 쌓이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죠”라며 ‘인형’이라는 말조차 ‘우리 아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인형매니아들에게 인형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숙명여대 이희정(영문·2)씨는 “작년에 친구와 똑같은 인형을 샀는데 화장을 고치고 머리 모양을 바꿔나가다 보니 지금 두 인형의 얼굴은 각 주인의 이미지와 비슷해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인형매니아들은 인형을 자신의 분신처럼 가꿔나가는 경향이 많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인형의 옷과 표정을 슬프게 또는 밝게 연출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신과학연구소 이문일씨는 “대인관계가 익명성을 띠고 디지털화 될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곳이나 정 줄 곳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 인형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때문에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인형매니아들을 대인관계나 성격에 문제있는 사람으로 보려는 시선도 있다.
오는 8월 개봉하는 공포영화 인형사(장용기 감독·2004) 영화홍보실에서는 ‘극 중 옥지영이 연기하는 인형매니아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에 항상 분신처럼 인형을 갖고 다니는 캐릭터로 표현될 예정’이라고 밝혔듯, 일반인들은 ‘인형매니아들은 대인관계에 소극적이고 애정결핍증이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이에 ‘인형중독’(http://doll8485.cyworld.com)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ㄱ’씨는 “인형매니아 동호인들이 조금 내성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지만 인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면서 능동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고 말한다.
한편 우리 학교 김현정(국문·2)씨는 “갈수록 인형을 여성의 신체와 유사하게 표현하는데 치중하고 있다”며 비판을 가했다.
예전의 바비인형처럼 지금 생산하는 여자인형들도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 맞춰져 있어 수동적으로 보이는 표정·가슴이 부각된 몸 형태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형제작기술이 발전하면서 인형의 성기까지도 사람과 똑같이 재현된 섹스인형들이 인형판매사이트에서 야릇한 표정과 자세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순수했던 인형문화가 ‘성’을 파는 산업으로 변질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인형문화는 ‘감성의 상품화’와 ‘성 상품화’라는 이질적인 두 방향의 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두가 어린 시절 한번쯤은 인형을 키우는 부모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형문화가 더 자라지 않고 유아기 놀이기구로만 정지해 있길 바랄 수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왕 인형의 부모를 자처한 거라면 인형을 ‘바르게 잘 키우려는 마음’을 끝까지 잊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