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망스"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로맨스에 대한 환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화다.

오히려 우리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는 영화라고나 할까. 로맨스에 대한 기대 뿐 아니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포르노 배우도 출연하고 소위 "벗는" 장면도 많은데 그러면 포르노 영화인가, 싶어서 들여다보면 그것도 아니다.

포르노적인 장면에 대한 우리의 시각적 쾌락도 철저히 모른 척 하는, 한마디로 불편한 영화인 것이다.

주인공 마리의 계속되는 "보이스 오버"는 여성의 성적 판타지와 성적 실천, 그에 수반되는 쾌락과 위험에 대한 "여성 자신"의 보고서다.

흔히 영화에서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보이스 오버가 여성의 목소리로 제시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 영화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감독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했다지만 그녀가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 한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제는 여성도 성적 욕망을 갖고 표현하게 됐다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한편 그 속에서 고분분투하는 우리들 사이의 간극을 슬프게 떠올렸다.

성적 욕망이 모든 육체를 가진 자들의 운명이라고 치기에는 그것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의 경험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현실. 이제는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여성들의 수동성이 별 매력이 못된다 하니. 순결 이데올로기는 이제 어느 정도 넘어선 것일까? 그렇다 해도 그 성적 욕망이 과연 누구의 언어로 주조된 누구의 욕망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여전히 여성을 하나의 "구멍"으로 여기고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많은 성적 실천들은 오히려 더 여성의 입을 막고 여성 자신의 욕망을 탐구할 기회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하습되는게 아닐까? 주인공 마리가 부딪힌 수많은 난관-강간에의 위협, 남자친구의 일방적인 거절과 일방적인 섹스 행위 등-은 지금 여기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어떤 것이며, 이것이 나라는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기술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나서려고 할 때 어림없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상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여성들 개개인이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물론 이것도 개개인으로서는 중요하다고 보지만), 이성애의 각본 속의 남성중심적 판타지르 해체하는 방법의 모색이 될 것이다.

여성을 욕망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기보다 하나의 육체, 하나의 "구멍"으로 여기는 이 사회의 지배적인 남성중심적 성적 판타지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무엇일까? 그것은 "구멍"의 의미를 재전유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마리가 말하듯 "들어와서 (꽉 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버리는 " 여성의 질은 더이상 남성성기를 만족시켜주는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일 수 있다.

사실 아이의 출산도 질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가. 남성들은 자신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여성의 "구멍"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술을 철학으로, 문학으로 포장한다.

세상의 타락은 언제나 여성의 구멍으로 은유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질, 입술(눈이나 질이나 입술이나 다 구멍 아닌가!)은 여성 경험의 드러냄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인결을 가진 존재들, 세상을 향해 열린 여성들의 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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