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시리즈-(3) 몸과 언어

우리는 보통 "의미가 전달됐다", 혹은 "의미가 잘못 전달됐다"고 말한다.

마치 의미란 것이 한 조각의 사과처럼 주고받기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의미"란 어느 순간도 하나로 고정된 것일 수 없는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한국사람에게 "밥먹어라"라고 말하는 것도 말의 억양에 따라 다정하게 "밥 먹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가 하면, 윽박지르듯이 "밥 먹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화교 다리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안면있는 사람에게 미소 지었는데 그가 멀뚱멀뚱하거나 외면한다면 우리는 "저 사람이 날 싫어하나?"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어쩌면 그는 사실 눈이 나빠서 나를 못본것이거나 그간 발생한 사고로 이해 기억 상실에 걸렸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상적 맥락에서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만큼 눈이나 입에 주름을 만들며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안녕"이란 말과 대등한 언어표현이 될 수 있다.

언어학자 소쉬르에 의하면 체계를 이루고 있는 자연언어는 일련의 관념들의 차이와 결합된소리들의 차이란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음소들간의 차이 체계가 바로 언어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몸알"을 통해서도 우리는 여러 표현을 할 수 있다.

그 몸알이 3차원적 다면성과 주름, 벌어짐과 오무라짐, 빛남과 그림자, 힘과 유연함, 여러 빛깔과 여러 음성의 변화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두 손을 동그랗게 꼭 쥐고 태어난 아기조차 손을 폈다 오무렸다.

손가락을 세웠다 접었다 하면서 몸으로 표현하지 않는가? 서커스나 마임, 무용은 음성이 아닌 동작들의 차이를 세분하여 의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무성 영화 배우들은 간단한 자막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면 내에서 보여줄 수 있는 동작의 차이만을 통해 의미를 표혀했다.

구두를 삶아먹는다는 상황 연출 속에서 찰리채플린의 몸짓-꼼꼼이 핥아 먹은 후 이 사이에 낀 쇠못을 빼내는 동작-만으로 우리는 그의 배고픔과 배부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광장이, 바람이 불고 어떤 냄새가 나고 시시 각각 햇빛의 광도가 변하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진짜 공간들이, 우리가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데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는 시대이다.

내가 당신을 굳이 그 광장에서, 이화교 다리 위에서 만나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모니터에서 문자와 글, 이미지라는 수다을 통해 감정, 의사, 뜻을 표현할 수 있다.

글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지만 손을 잡는 행위처럼 마음까지 보듬긴 힘들 것이다.

우리의 삶의 세계가 전자파와 광섬유들을 통해 전달되는 문자와 이미지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확장되고 그로 인해 우리 지각 영역을 넓히게 된다면 그만큼 그 삶의 세계 속에서 새로이 빚어지는 의미의 계열들도 바뀌게 되지 않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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