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는 오묘한 영화다.

끊임없이 색상의 이미지를 건제고, 또 수많은 기호를 담아내고 있다.

Michael Deville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다시 태어난 ‘책 읽어주는 여자’는 우리에게 ‘책 읽기, 더 나아가 글을 쓰고, 읽는다는 문학, 그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따라 흐르고 있다.

주인공 마리 콩스탕스에 의해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책이 읽혀지고, 그 책의 내용이 다시 영상으로 나타난다.

즉, 마리 콩스탕스는 읽는 존재인 동시에 읽혀지는 존재이다.

이것은 원작인 소설에서는 엇ㅂ는 설정으, 이것이 원작을 옮겨 영상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아주 재미있다.

원작인 소설을 읽고 있는 주인공 마리 콩스탕스가 소설의 주인공을 자신으로 가정하고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재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텍스트 속에서 자신의모스을 찾아내는 것, 거기서 자신의 꿈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리고 자신의 갈 길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 아닐까? 이번에는 읽혀지고 있는 책, 즉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다라 시선을 옮겨보자. 이 세계에서는 또 하나의 마리 콩스탕스가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르 썩히지 말자는 생각에 ‘책 읽주는 일’을 하게 된다.

친구가 없는 장애인 사춘기 소년, 자신의 환상 속에서 지내고 있는 귀부인, 성욕에 불타오르고 있는 40대 부유한 사업가 등 그녀의 고객들은 제각각이다.

가장 맨 처음으로 마리와 만나게 된 사춘기 소년 에릭은 모파상의 단편 시리즈를 탐독하는데, 책 읽는 도중 ‘그녀의 머리카락은 굽이쳐 흘러’와같이 에로틱한 상상이 들어갈 여지가 있는 내용이 나올 경우 그는 마리의 짧은 스커트 사이로 드러나는 허벅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두 번째 고객인 백작 부인은 레닌과 마르크스를 숭배하는 여인으로 그녀는 책을 읽는 것보다 자신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물이다.

또 다른 고객인 40대의 사업가는 아예 처음부터 마리에게 원하는 것이 독서 행위가 아니라 성행위이다.

이 모든 고객들은 마리 콩스캉스에게서 순수 문학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고 자신의 욕구를 충조시켜주길 바란다.

즉 문학은 욕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마리 콩스탕스가 읽어주는 이야기가 그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하나의 매개물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책만을 읽어주길 바라고 그 곳에서 자신의 환상과 추억, 욕구를 풀어헤쳐 놓는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성적 욕구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5명의 고객 중 세 명의 남자가 그녀에세거 성적인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조계 인사는 마리 콩스탕스에게 사드 백작의 책「소돔에서의 120일」을 읽어주길 청하고, 친구들까지 불러들여 함께 성적 쾌락을 느끼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집단 섹스와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문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나오는 성적인 기호들의 나열이 중요할 뿐이다.

여기서 또한 문학 텍스트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건을 찾아볼 수 있다.

문학을 창작하는 행위와 그것을 즐기는 행위 모두는 과거부터 철저히 남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문학 텍스트는 남성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남성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남성에 의해서 쓰여진 텍스트는 남성들의 시선에서 보면 여성과 동일시 될 수 있다.

마리는 영화 내내 남성 고객에 의해 조종당한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 오라면 입고 오고, 성관계를 원하면 성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도 “저는 책 읽어주는 여자일 뿐이지 더 이상 어떠한 것도 해드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고고한 척 하면서 결국은 남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흔히 남성 문학에 등장하는 여성상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잇다.

‘자신의 꿈을 찾고, 또 다른 자신을 만나 제 3의 경험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정의는 결국 읽는 이의 욕구에 따라 텍스트는 움직이게 마련이고 그것을 남성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면, 문학이란 남서으이 권력 밑에서조종되는 것이 가능한 대상일 수 있다는 정의와도 맞닿아 았다.

읽어주는존재이길 원했던 마리 콩스탕스는결국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읽혀지는 존재가 되고 마는것이다.

남성이 문학을 바라보는 한 일면을 접할 수 있는,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였다.

이제 우리는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해 상상력을 펼쳐보일 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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