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정·대학원 국문과 석사 1학기 1991년 12월 클렘린 궁에서 붉은 기가 내려지면서 온 세계가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소련과 동구유럽의 사회주의 몰락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대별되어온 세계질서의 축을 무화시켰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모는 일부 좌파 지식인과 문학가들에게 하루 아침에 나침반을 잃어버리는 위기감을 주었다.

활발한 토론과 투쟁의 자리에 쓸쓸한 반추가 맴돌았다.

이념을 상실한 시대, 우리의 갈길은 어디인가? 우리의 화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질문이 주는 무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끊임없는 반성과 모색이 따랐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가 그토록 의지했던 이념의 실가 무엇이며 그 거대한 이론과 인간의 일상행동의 거리를 규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환상과 약속의 자리에 새 가능성을 심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최인훈이 면벽 20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우리 앞에 다가섰다.

최인훈, 그는 이명준이라는 문제적 주인공을 우리 앞에 내세워 밀실과 광장의 변증법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제기한 작가였다.

우리는 그의 소설 「화두」에서 이명준의 부활을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해방, 미군정, 잇단 군부독재, 광주항쟁 등 시대적 격변과 독일 통일과 소련의 붕괴 등의 세계사적 쟁점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화두를 풀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명준과 닮아있다.

이 소설은 요즘 유행하는 후일담 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후일담 소설의 유행은 결국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국면 읽기의 어려움,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어려운 지경에서 과거를 뒤돌아 봄으로써 현재를 가능하게 한 힘의 원천을 찾으려는 의도다.

「뒤돌아보기」에 대한 금기는 세계 곳곳에 신화와 전설로 가득차 있다.

뒤돌아 본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이다.

「앞에 무엇이 있다는 약속도 없고 법칙이나 예언의 신빙성도 떨어진 시대에 인간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가? 뒤돌아 보는 것만이 암흑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며 그의 이성의 방식」이라고 작가 자신도 밝히고 있다.

우리의 기억을 찾아내어 그 맥락이 기억들 사이에 옳은 연대를 만들어내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며 역사를 바로 잡아나가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뒤돌아보기의 핵심인 화두는 무엇인가? 그의 소설은 조명희의 소설 「낙동강」으로부터 시작한다.

결말은 러시아 여행에 나선 그가 조명희의 묻힌 저작을 찾음으로써 끝난다.

주인공과 조명희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것이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요한 코드이다.

소설 「낙동강」에 대한 감상을 소설화시켜 문학적 가능성을 인정받고 또한 이 때문에 지도원선생에게 불려가서 혹독한 심문을 당한다.

이 축복과 심문은 너무나도 상반되는 요소이지만 원인은 동일한 곳에서 나오기 때무에 균형감각을 지닌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가 된다.

소설 끝부분에서 조명희의 글을 구한 주인공이 이제서야 상처와 소명에 대한 화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

화두는 결국 심리적인 자기동일성이며 균형감각이다.

책 읽기와 그를 둘러싼 거친 물리적 환경 사이, 소련과 미국 사이, 축복된 소명과 위협적인 심문 사이, 생물 구성체와 사회적 구성체 사이의 균형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화두이다.

그는 소설에서 말한다.

「화두는 그것이 철학적이든 종교이든 혹은 그 어떤 다를 것이든 간에 그런 지적인 체계도 아니며, 현실적이긴 하나 좁고 제한된 세계나 정치 그 자체도 아니며, 1920년, 30년대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인생을 던져 풀려고 그렇게 몸부림쳤던, 그 몸부림 자체가 나의 몸으로 알아진 상태라기 보다는 나 자신이 그 몸부림이 되는 실감이 드는 빙의과 환생이다」라고. 그는 실제로 조명희, 박태원, 이태준 등 선행의 어느 세대의 환생, 빙의로 자기를 인식하는 자기 확립의 매개적 형식을 쓴다.

「화두」를 읽으며 우리는 가끔 당혹감에 빠진다.

전반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포리즘, 희곡의 일부분, 시, 작가의 유작, 신문기사 등이 군데군데 실린다.

관념, 이데올로기의 안내를 받으며 진행되는 시대와 문학과 역사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질문과 물음은 도도한 사색과 관념의 드넓은 바다에 우리를 남겨둔다.

우리는 그의 만연체의 문장과 해박한 지식에 골치를 앓기도 하며 작품전반에 놓여있는 우리 민족의 원형적 감정인 유이민의식에 슬픈 비애를 느끼기도 한다.

실제도 「화두」는 한권의 사상서에 필적할 만큼의 정신적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서구와 동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근대와 현대를 뛰어넘는 그의 관념의 편력을 유희가 아닌 지적 성찰과 분석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집요한 기억의 반추를 통해 원산체험은 상처의 확인 위한 러시아행을 결단케하고 결국은 극복의 가능성을 남긴다.

백치의 상태로 숨져간 레닌과 그가 이루어놓은 빛나는 이념의 세계, 그리고 이념의 원형을 러시아에서 찾고자했으나 결국은 그 러시아에 의해 버림받은 조명희의 삶에 동일화됨으로써 그는 결국 자신의 화두에 다가섰으며 법열의 설레임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대는 거대한 한마리의 공룡이라는 작가의 비유가 떠오른다.

꼬리는 자신의 머리가 어디쯤 가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지만 자기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꼬리는 여전히 19세기 봉건적 잔재의 진흙구덩이에서 안간힘을 쓰고 머리는 21세기를 향해 긴 울음을 우는 공룡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꼬리와 머리의 동일화는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역사는 여전히 그 자체의 법칙에 몸을 맡기며 운동하고 있다.

다만 그 방향이 예측불가능이며 약속도 청사진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약속과 청사진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우리이며, 오늘 우리는 최인훈의 「화두」를 통해 모색을 위한 지도 하나를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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