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비극은 거짓제사와 희생된 제물의 조좍으로 극단 「백토」의 「사제와 제물」을 보고 요즈음같이 상업주의로 인해 풍속극이 범람하여 연극 관객의 양적 확대는 이루어졌으나 그 질적 저하를 개탄하는 시기에, 기성 극단이 노동극을 공연한다는 점은 그 사실 자체로도 흥미롭다.

극단 「백토」의 「사제와 제물」은 기성극단의 상업성을 생각할 때 큰 의문점을 던져주었다.

왜 하필 노동쟁의와 죽음의 이야기를 무대위에 올려놓는가. 이 또한 시대의 관심에 영합하는 상업주의의 발로란 말인가. 사실 지난 반년은 이 몇년간 가장 우울한 시대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수많은 열사들이 쏟아져나왔고, 이제 세인은 「열사 불감증」에 걸린지 오래다.

평범한 시민 노동자와 학우가, 어느날 갑자기 「열사」의 칭호를 받개 되는 현실을 개탄하든, 생명 경시의 풍조를 개탄하든간에, 그 누구에게도 이 시대는 하나의 비극적 구조를 안고 있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90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현 길인씨의 소설을 극화한 것이다.

주인공인 노동운동가 선우백은 회사측과 농성자들의 중재역할로 쟁의에 개입을 했지만, 처음부터 농성자들의 편에서 이 일을 하고자 한다.

농성 초기에는 언론사에서 연일 보도를 해주었지만 회사의 태도가 강경해지면서 언론의 태도는 변화, 보도조차하지 않게 된다.

세인의 관심이 멀어지자, 농성자들은 각종의 홍보전략을 마련하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절망적인 고립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 현실을 알리고자 홍보담당 책임자 이채원은 투신자살의 방법을 선택하는데, 이과정에서 선우백은 자신이 은밀하게 죽음에의 유혹을 농성자에게 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지금까지의 그는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지만, 이는 결국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투신의 길을 택하게 된다.

여기에서 노동쟁의를 통하여 억눌린 자유를 얻고자 하는 노력에 초점을 둔 종래의 노동극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 작품을 바라볼 관객이라면 낭패감을 맛보게 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둘의 죽음은 상황이 몰고간 필연적 결과로서 희생이라기보다는 자기설명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기 대문이다.

이 작품을 보고 결과적으로 난해하다거나 모순ㄴ이라는 지적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동운동 본래의 목족보다 세인으로부터의 관심을 이끌고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슬픈 현실이며 또한 일의 성취를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택하도록 방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제와 제물」은 농성자편의 시각보다는 보수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기성사회의 시각을 담고있다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사제와 제물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사회에서 이데올로기를 추종하거나 선도하는 집단은 그 사회, 역사적 진실에 개인을 함몰시켜놓으려 하는데, 이는 대부분 정치적 조작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제사의 역사는 개인의 삶과 진실 위에 집단의 가치를 군림시켰다.

그러나, 제사를 주도한 사제는 그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다른곳에서 빌어다 썼다는 점에서 가짜임이 드러난다.

작품이 보여주는 바 타인을 위하여 장려랗게 죽는다는 것 자체가 지고한 희생이라면, 전체를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해야한다는 말은 자기 희생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허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시각 전환은 높이 살 만하며, 단순한 「노동쟁의」라는 극적 설정에서 벗어나 역사와 민중의 관계 위에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원초적으로 노동운동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라든가, 이 슬픈 현실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은 외면한 채 다만 휴머니즘을 기지에 둔 이 작품은 그 미약한 주제 의식에 대해 비판의 여지가 있으며, 연극화 과정에서, 본 주제와는 오히려 일반적인 기존의 노동극 형태를 빌어 관객의 오판을 유도한다는 점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어떠한 의도에서 무대에 올려졌건 간에 비극의 현실을 돌아보고 이 문제를 일반에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기성극단에 의해 대중에 접근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영미 의예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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