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주최 현상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 무녀리(9)
본사주최 현상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 무녀리(9)
  • 이대학보
  • 승인 1991.0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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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는 개강 준비로 학교에 가서 우편함에서 형의 편지를 받았다.

보통 편지와 달라 눈에 띄었다.

방학동안 학교를 나가지 않아 한참 전의 편지를 받았다.

몇 줄 안되는 편지 속에서 구속되었음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그동안 형에 대해 무심했던 자신을 비난했다.

병태는 형 면회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변호사 문제도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형이 보고 싶었다.

쇠창살 너머 형은 병태의 예상보다 초췌해 보였다.

백년쯤 빛을 못본듯이 얼굴색이 하얗게 뜨고 걸어 오는 모양도 옷에 팔다리가 감겨 있었다.

회색 수인복에 아주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병태에게 있어서 형은 김형태이기보다 형이듯이 그 속에선 「죄인 김형태」이렇게 말하듯이 「몇번 김형태」라고 불렀다.

3분이란 제한시간동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병태에게 형은 집안 안부부터 물었다.

『아버진 여전하시고, 어머닌 형 걱정 많이 하셔』 병태는 면회 오기전에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어머니의 푸념만 들었다.

자신이 자식을 잘못 키워서 그렇다며 공판에 가고 싶지만 아버지가 말린다고 걱정하셨다.

예측컨대 오시기란 불가능했다.

『내 걱정하지마, 잘 있으니까』 형은 천천히 얘기했다.

쇠창살을 건너 오는 그 말은 으례하는 말이면서도 그 안이 무척 힘들다는 말로 와 닿았다.

『나 땜에 과외집에서 쫓겨 났다며?』 병태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신문 보급소에 있는데 훨씬 마음도 편해. 눈치도 안보이고. 형 나오면 한번 와라』 「나오면」이란 말에 병태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이 형식적으로 들리지 않길 바랬다.

『난 네가 대학와서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참 대견스럽더라』 형이 굳이 지금 병태의 대견스러웠던 모습을 보며 형의 꿋꿋함을 보는 것 같아 막연히 걱정할 때 보다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면회시간 끝났으니까 나가주십시오』 형은 그말과 동시에 끌려 들어 갔고 병태는 누가 잡고 있어서 못 떠나는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병태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가고 침을 삼킬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왼쪽에 검사 오른쪽에 변호사를 두고 재판관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의 뒷모습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검사는 여러 자료를 들추고 재판관에게 보여주고 피고에게 확인시키며 징역 5년을 주장했고 변호사는 현정권의 인권탄압 운운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피고는 최후 진술 하십시오』 재판관의 나즈막한 지시가 떨어지자 형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제서야 병태에게 형이 어떻게 포승줄에 묶여 있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는 원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가출을 했습니다.

저는 농사는 돈을 못버는 일이라 생각해서 서울에만 올라오면 큰 돈을 벌고 예쁜 색시도 얻고 부모님도 모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집을 떠나면서 생각했죠. 가출로 부모님을 걱정시켜 드린 것 몇 배로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형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연락이 갔을텐데 오늘 안 오신 것을 보면 저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되도록이면 짧게 하십시오』 재판관이 형의 말을 가로막았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자연스런 감정마저 제약받고 있었다.

병태는 반사적으로 재판관을 보았다.

표정없는 그 얼굴은 비슷한 얘기를 수없이 들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가 준비해온 만큼 다 하겠습니다』 형도 재판관의 무표정을 이미 각오한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서울와서 제일 먼저 취직한 곳이 ㅎㄷ공업사였읍니다.

프레스 작업을 주로 하는 곳이라 걸핏하면 손이 잘려 나가는 바람에 4개월 후엔 두 사람이 남게 되었읍니다.

그때 월급은 야근, 특근 다해서 15만원이었는데 방값과 세금을 내고나면 생활비가 간신히 나왔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직업학교 훈련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배워서 ㄷㅇ기계 선반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문선배가 내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전 반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쓰레기로 꽉 차 있다, 타락해 있다,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을 통해서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기계를 사용하다가 불편하면 머리를 쓰고 노동력을 들여 기계를 발전 시키듯이 말입니다.

오랫동안 그 간단한 이치를 몰랐던 거죠. 문선배가 노조를 만들자 즉시 가입했습니다.

우리가 불편해하는 공장의 근로조건, 임금등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 형의 최후 진술은 5분동안 계속 되었다.

노조에 가입하게 된 동기, 그간의 활동, 그리고 문선배의 해직 이후 아침 출근 투쟁에 대해 주도적 역할을 했고 최근 임금인상 투쟁을 벌였던 얘기를 간략하게 했다.

『……여기에 온 저희 동지들을 사랑합니다.

웬지 사랑이란 말을 쓰니까 여자한테 하는 말 같아 쑥스럽지만 진심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모든 노동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때문에 이 자리에 섰고, 자본가에 대한 분노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심려끼쳐드려 죄송하고 여기에 와 준 제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병태는 가슴 속에서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하마터면 눈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어금니를 물었다.

형이 버티고 있는 한 자신도 형에게 꿋꿋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형이 다시 자리에 앉고 재판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공판이 있을 거라고 했다.

형은 교도관 두 사람에게 팔을 붙들린 채 일어섰다.

『형!』 공판이 끝나고 어수선한 틈에 병태는 형을 불렀다.

뒤돌아 보는 형에게 병태는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주먹을 굳게 쥐어 보였다.

형은 싱긋이 웃어 보이고는 왼쪽문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며 형의 뒷모습이 가리워지는 것을 지켜보다 사람들은 돌아섰고 병태는 피부로 느껴지는 형과의 단절감에 몸서리쳤다.

재판장을 나오면서 미정이를 떠올렸다.

같이 있었더라면 이런 단절감을 지금보다 수월하게 견딜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임신으로 괴로와하는 미정에게 웬지 부담스러워서 얘기하지 않았었다.

미정이에게 가고 싶었다.

하여튼 대리석이 사람을 가두고 재판하는데 한몫 하고 있는 서초동 법정을 떠나고 싶었다.

방문 앞에 미정이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방의 불은 꺼져 있었으나 미정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병태는 이상한 예감에 문을 열어 재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미정이가 울고 있었다.

『미정아, 왜 그래?』 방바닥에 이불도 깔지 않고 늘어 붙어 있는 미정이를 안아 일으키려다가 바로 뉘었다.

『나, 아……파. 많이』 울음소리랑 말소리랑 엉켜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수술했어?』 놀란 병태가 다그쳐 물었다.

미정이는 눈물이 엉겨 붙고 있는 얼굴로 끄덕였다.

『사람을 죽였어……사알…인으을…』 미정이의 억양이 격해졌다.

병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직접적으로 몸에 통증을 느낀 사람은 미정이였기 때문에 방관자 같은 자신의 말은 공허할것만 같았다.

『미정아, 그만 울어. 많이 아팠지. 이젠 가야지』 병태는 미정이를 안고 진정되길 바랬다.

병태의 머리 속에서 재판장에 섰던 형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격리된 형의 존재가 주는 외로움 속에서 미정이가 같이 있어 주어서 한없이 고마왔다.

『왜 혼자 갔었니? 나랑 약속해 놓고』 『요새 힘들어 했잖아.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병태는 미정이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랬다면 같이 형의 재판을 보고 병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려운 일 있으면 혼자 힘들어 하지 말고 얘기하자』 부담이란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게서 느끼는 건지 몰랐다.

사랑한다면 서로의 짐을 나눠질 수도 있고 한 사람이 아프면 나을 때까지 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어야 하리라. 울다가 지친 미정은 잠이 들었고 미정이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방안을 날아다녔다.

병태는 둘이 잉태했던 무녀리의 영혼도 평온히 잠들길 바라면서 무거운 눈을 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