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이의 자취방과 보급소는 멀지 않아 같이 전철을 타고 다녔다.

전철이 한강 다리 위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을 때였다.

『내리자. 나 강가를 걷고 싶어』 미정이에겐 그렇게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둘은 곧 한강 시민공원 표지판을 지나 계단이 연달아 놓여진 한쪽 구석을 걷고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고여있는 것도 같았고 흐르는 것도 같았지만 그렇게 보였다.

곳곳에 연인들이 앉아 있었다.

자신들도 그들에 묻혀지는 평범함에 병태는 문득 이런게 연애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시에 미정이와 부딪히는 벽이 느껴졌다.

남자가 운동권이면 비운동권인 여자와 연애가 가능하지만 여자가 운동권인 경우에는 비운동권인 남자와 연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흑백논리로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갈라 전혀 공통점없이 생각하는 언론이 무서웠고 그것에 얽매이는 자신도 한심해 보였다.

『미정아, 혹시 연애 해봤니?』 미정인 대답대신 입꼬리만 살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웃을 때면 미정이의 볼엔 볼우물이 패여 맑은 물이 고여 있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니?』 『혹시 너 나 좋아하고 있지 않니?』 『이제야 고백하는 거니? 물어보는 거니?』 미정이의 장난기 섞인 물음에 병태는 여러가지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미정이와 내가 도대체 어떤 연인이 될 것인지, 서로 얼마만큼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 『그래, 이젠 감정을 묻어 둘 데만은 아닌 것 같다』 병태는 그동안 미정이에게 느껴왔던 감정들을 얘기했다.

침묵의 진지함으로 병태의 얘기를 듣던 미정이가 아주 느릿느릿 얘기를 시작했다.

『나 혼자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어. 난 사랑을 생각할 때 동지애를 생각했었어. 같이 운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고 내가 남자에게 도움받는 일도 없을 거라고. 물론 이건 절대로 남자에게 의지하는 여자가 되지 않겠다는 나의 소신이었지. 그런데 요즘엔 진짜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어. 』 병태는 언제나 미정이의 얘기를 기대감을 갖고 듣듯이 미정이의 작은 손놀림조차 놓치지 않았다.

계단 밑으로 지나가는 한쌍의 연인이 위에서 보기에는 강물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가 입은 긴 플레어 스커트 자락이 바람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네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이 세상에 네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힘을 얻을 때 이런게 동지애인가보다라고 생각해. 그전까지 생각했던 것은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나뉘어지는 동등함이었던 것 같아. 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것들을 기계적으로 생각했나봐. 잴 수 없는 많은 부분이 오고 가고 있는데 말야. 널 알게된 후 그런걸 깨달았다.

』 그날 병태는 이 세상 어느 여자에게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갖게 마련이었다.

새벽에 병태는 형이 나타난 꿈때문에 엷은 잠에서 헤매고 있는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병태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서보니 다른 아이들도 벌써 섬짓한 소리에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만수형은 얇은 담요를 걷어 치우며 애들에게 물었다.

병태는 맥없이 옆을 보다 영철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영철이가 없어』 합격자 발표가 다음날이라고 걱정된다며 자던 아이한테 밤새 불합격을 알았나 싶었다.

세면실에선 계속 물흐르는 소리가 나고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병태는 곧장 세면실로 달려 갔다.

자물쇠가 없는 문이라 병태가 열어 젖힌 순간 한쪽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는 영철은 반실신상태였다.

영철은 통증에 못 견디겠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사력을 다해 입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119 돌려. 아니, 내가 업고 갈께』 『비켜봐. 이런 꼴 많이 봤어. 피부터 멈추게 해야 돼』 『빨리가서 아무 헝겊이나 가져와』 한바탕 엉키고 설키어 난리였다.

그 가운데 간신히 팔목을 동여매고 병태가 업고 응급실로 갔다.

다행히 정맥만 상했을 뿐 동맥은 멀쩡하다고 했다.

일주일만 치료 받으면 완쾌될 것이라고 했다.

몇 시간후 약간 원기를 회복한 영철은 무작정 울기 시작했다.

『형, 나 전화로 알았어. 나 떨어졌대. 형은 내가 병신같지? 흐……흑, 꼭, 난 형이 다니는 학교에 같이 다니고 싶었는데……. 흑, 난 대학에 갈 수 없는 팔잔가봐. 난 열심히 했어. 흐흑, 흐흑, 이젠 포기할거야. 아니 죽고 싶었어. 형, 난 애초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형 난 처음부터 실수였다구. 흐흑, 흐……흑, 흑, 흐……』 병태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철이가 안정이 되도록 손을 잡아 주는 일 뿐이었다.

영철의 오열에 동요되어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가난한 애들에게 대학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아예 20미터쯤 앞에서 출발한다.

추월당하거나 도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20미터 뒤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영철은 뒤에서 뛰다가 경기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생존에 대한 포기마저 감행한것이다.

해마다 수험생중 4분의 1만 대학에 가고 4분의 3은 가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 흔히 보이는게 대학생이었다.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4분의 3은 한번쯤 심한 자책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병태는 더이상 영철에게 다시 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무의미해 보였다.

그것은 절망만 가득찬 곳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란 맹목적 믿음만으로 절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매한 일 같아서 영철에게 희망은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영철이를 보급소에 데려다 놓고 밖으로 나왔다.

미정에게 전화를 했다.

미정이도 다른 때와 다르게 기운이 없었다.

『나 술갖고 네방에 갈께』 『알았어, 저녁 준비하고 있으니까 빨리 와』 미정이의 집에 들어 가기 전에 구멍가게에 들러 소주 두병과 과자를 샀다.

『무슨 일 있구나』 힘없는 비닐봉지에 소주 두병이 달그락대고 그 비닐 봉지를 든 병태는 소주 두 병의 무게도 힘겨워 보였다.

『그래』 『연락 좀 하지. 보급소에 전화해도 없더라』 『밥부터 먹자』 방안에 차려진 상을 끌어 당기며 얘기했다.

『맛있다.

이거 다 네가 만들었니?』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일 나가면 집안 일은 다 내가 했는 걸, 뭐』 병태는 며칠동안 괴롭혀 온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참, 너희 집은 어머니가 힘드셨겠다.

아들만 둘이 있으니』 『아냐, 우리 형이 얼마나 음식솜씨가 좋은지 아니?』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밭일을 하면 형태는 병태에게 밥이며 반찬을 맛깔나게 챙겨 주었다.

『참, 형은 소식없어?』 병태도 미정이가 말하기 전에 어린시절 회상 끝에서 형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글쎄,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만 믿고 있어』 『집에는 무슨 연락없대? 방학인데 집에 한번 갔다오지 그랬어』 『개강도 얼마 안남고 개강하고 어머니 생신에나 가봐야 겠다』 『걱정하실텐데 전화라도 해드려』 『그래,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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