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대학교 그늘 안에 싸여 있는 벤취는 여름이 피해가고 있었다.

햇빛은 촘촘한 나뭇잎을 뚫지 못하고 바람은 벤취 한 쪽 끝으로 불고 있었다.

미정은 학교에서 일이 있다며 병태에게 학교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형 얘기 좀 해봐』 병태는 미정에게 입주 과외 집에서 쫓겨난 이유를 얘기하다가 미정에게 형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노조 같은거 하나봐. 나도 잘 몰라』 『그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글쎄 난 잘 모르니까, 굳이 말한다면 운동하는 사람들이 무기력해보여. 어차피 질 싸움에 매달려서 자기까지 다치고』 『만약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면?』 『최소한 우리 형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이상 미정이는 묻지를 못하고 병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병태는 자신의 말에 미정이가 기분이 상했나 싶어 미정이의 표정을 살폈다.

『실은 너에게 학교에서 약속있다고 했던 거 다 세미나 모임 때문이었어. 아직은 이것이다란 확신은 없지만 지금 내 생활은 그래』 미정이는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렇게 말했다.

『너랑 부딪히게 될 문젠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늘 과정에 있으니까 살아가면서, 만나가면서 극복할 수 있겠지』 병태는 형이 수배된 것을 알때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건 단순히 구속을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둘 사이에서 그것이 어떤 충돌로 다가올 것이며 누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애정에 묻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득 인호 선배가 생각났다.

1학년때 들어간 사회과학 학회를 맡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당시 3학년이었고 시위때마다 화여멍을 들고 전경과 맞서곤 했다.

제작년 6월 10일 아침 학회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학회실로 모이라고 했다.

『얘들아 6. 10이다.

작년 6. 10은 온 나라가, 민주주의 함성으로 끓어 올랐었단다.

얼마전 조성만 학형이 공동 올림픽·미제축출을 외치며 할복자살을 했던 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테고. 오늘은 남북한 청년 학생회담이 있는 날로서……』 인호 형은 그당시 1학년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를 하며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병태는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 말이었고 내키는 일도 아니라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전 안가겠어요. 더 안다음에 실천을 해야겠어요』 『그렇지 않아. 인식과 실천은 발전할 수 있는 거야』 인호형의 끈질긴 설득에 가투를 따라 나갔다가 공포감만 잔뜩 느끼고 돌아와 다시는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병태는 인호선배를 존경하면서도 감히 자신과 동일시 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인호선배는 졸업한 후 공장에 투신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3년동안 병태는 줄곧 방광자로서 주변부만 돌고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형과 미정이로 인해 정면 충돌하고 있었다.

이것은 선배와 논리 싸움 차원이 아니었다.

미정이와 부딪히는 건 운동만이 아니었다.

사소한 문제로도 의견대립이 잦았다.

『병태야, 얘기 좀 하자』 병태는 무슨 문제로 저러나 싶어 마음을 다 잡았다.

『나 담배 피우고 있어』 미정이는 가방에서 뒤적뒤적하더니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내 의견은 세상 다른 여자는 다 피워도 넌 안된다는 거야. 운동한다고 담배피는 거 보기 싫더라』 『그건 이기주의야』 병태는 자신의 걱정을 이기주의라고 몰아붙이는 미정에게 섭섭했다.

『왜 이기주의니? 다 네 건강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미정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피잖아』 『나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남자니까 사교 수단이 될때가 있어』 미정이는 아까 흘린 웃음을 주워담으며 심각하게 얘기했다.

『좋아.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봐. 우선 다른 여자는 피워도 내 여자는 안된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이기주인지 알아? 다른 여자는 다른 어떤 남자의 여자가 될거야. 결국 내 것만 잘 챙겨먹겠다는 의도잖아』 병태는 미정의 논리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젠 감정 그대로 얘기해야 했다.

『어쨌든 난 싫어』 미정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넌 담배 왜 피니?』 『머리가 복잡할 때나 속상할 때 한대 피면 조금은 가라 앉거든』 병태는 그제서야 왜 자기가 담배를 피는지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같은 이유야. 네가 풀리는 것처럼 나도 그래』 병태는 미정이가 이해될 듯 싶었다.

그후 카페에서 담배 피는 여자들을 보게 되면 자신과 같은 이유로 연기를 내뿜고 있다는 것을 애써 생각했다.

미정이는 사귈수록 정이 드는 아이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병태와는 다르게 사람들과 쉽게 어울렸고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별 오해가 없었다.

그래서 미정이에게는 라면 한 그릇을 놓고 나눠먹을 수도 있었고 돈이 없으니 저녁을 사 달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보급소의 여름은 열대지방으로 옮겨온것 같았다.

천정에 달린 유일한 선풍기는 빠르게 돌면 돌수록 더운 바람만 불어댔다.

서로의 살갗이 조금만 닿아도 접착제처럼 끈적거렸고, 다 모이게 되는 저녁이면 여러가지 냄새가 섞여 고약한 악취를 만들어 냈다.

서로 코를 킁킁거리면서 자다보면 달구어진 육체들이 얽혀 짜증스러웠다.

병태는 낮에 만났던 미정이가 했던 말을 곰곰히 되씹고 있었다.

병태가 읽어간 책에 대해 묻고 민중, 역사 등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었다.

미정이는 기본적 시각조차 잡히지않은 병태에게 열변을 토하며 설명했고 병태는 미정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해하려했다.

왜 그동안 단순하게 노력만큼 댓가가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는지 바보스러웠다.

상품가격과 임금에 대해 얘기할땐 신기한 사실을 발견한 학자처럼 뿌듯해 했다.

『이제 네 형이 이해가니?』 여태까지 병태가 형에게 가졌던 것은 지울 수 있는 가슴뿐이었다.

미정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순 없다고. 그말에 반박했었다.

이해와 사랑은 동일하다고. 그러나 사랑과 이해는 상호작용을 했다.

사랑하게 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사랑하게 되었다.

병태는 후덥지근한 보급소바닥에 몸을 굴리며 미정이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병태 형 자?』 책상 앞에 쭈그리고 공부하던 영철이가 나즈막히 불렀다.

워낙 기상시간이 예민한 곳이라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면 안되었다.

『아니』 병태는 미정이의 생각을 뚝 끊어내지 못한 채 한참 후에야 영철이 쪽으로 돌아 누웠다.

『지도원을 해야겠어』 『그것도 경쟁이 심하다던데』 학원에서 지도원은 상당했다.

수업료가 감면되면서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

도서실 이용자에게 주의를 준다는 명목으로 한마디쯤 훈계할 수도 있고 청소상태를 지적하며 거들먹거릴 수 있었다.

학원생들보다 한단계 높다고나 할까. 가장 좋은 자리는 늘상 이 지도원의 자리였다.

그 중에서 영철이가 기대하는 것은 수업료 감면이었다.

작년에 제대로 대학에 갔으면 1년 동안의 학원 수업료는 아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도원의 자리는 그 이익만큼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하긴 고 3만 뽑는다는 얘기가 있어. 왜 그렇지?』 『졸업한 사람은 머리가 좀 컸다고 마음대로 해서 안 뽑는다더라』 재수했던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영철에게 일러주었다.

『그럼 난 안 되겠네』 병태는 그 말에 영철에게 절망감을 주지 않았나 걱정되었다.

『아냐. 그래도 지원해 봐』 영철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리라. 무수한 절망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희망을 병태는 영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도원이 되면 지금보다 공부하긴 훨씬 쉬울텐데』 영철의 말 뒤에 씁쓸한 여운이 남았다.

『영철아, 그만 자야지. 내일 새벽에 어떻게 일어날래?』 『형 먼저 자. 나 조금만 더 하고 잘께』 숙소에서 더이상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고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영철은 병태가 만들어 놓은 깡통 스탠드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주지않고 밤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다며 병태에게 고마워 했다.

숙소 사면중 두면은 관물대처럼 사용하여 자신의 소지품을 넣어 두고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이 놓여져 있었다.

책상이라야 두툼한 베니어 합판으로 조립하여 조금만 힘을 주어도 결대로 갈라지기 일쑤였다.

책상위엔 몇개 안되는 책, 사전이 초라하게 줄 서 있었다.

영철은 서점에서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고 싶어 몇번이나 서성댔지만 쉽게 결정을 못하고 돌아섰다.

영철은 잠의 무게로 눌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책에 있는 글자를 머리에 집어 넣으려 애썼고 병태는 깡통 스탠드에서 새어 나오는 삼십촉 전구의 몸부림을 지켜 보다 잠이 들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