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름 골목길엔 자가용들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유리창마다 쨍하고 소리를 내며 햇살이 꽂혀 있었다.

내닫는 발바닥에 아스팔트가 녹아 묻어날 것만 같았다.

후덥지근한 바람은 부는 것이 아니라 살갗에 달라 붙었고 뜨거운 기가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었다.

병태는 무거운 사슬을 풀어내며 걷듯 곤혹스럽게 움직였다.

더위가 짜증스럽게 병태에게 달겨들었다.

방학을 맞은 병태는 자취방을 구할 생각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하나 더 알아보려고 기웃거리고 다녔다.

배달 시간과 수금시간을 피하려면 저녁 시간이 가능했다.

보급처 근처 카페에 붙은 광고를 보고 찾아 갔다가 먼저 온 사람에게 빼앗기고 오는 중이었다.

『죄송하지만요. 이 주소가 어디쯤인지 아시나요?』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병태에게 뭔가를 물어왔다.

『네. 길을 잘못 드셨군요』 병태에게 그 길은 눈을 감고 신문을 돌린다해도 실수하지 않을 정도의 길이었다.

『이 근처 사세요? 여긴 처음이거든요』 『제가 이곳은 훤하니까 같이 가 드리죠』 병태는 길을 묻는 사람에 대한 예절이라 생각하고 앞장 섰다.

그러다 곧 웬지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학생이세요?』 병태는 이 여자가 학생이면 공통화제에 접근하기가 쉬우리라 생각했다.

『네, ㅈ대학교 유아교육과 3학년이예요』 『저는 ㄱ대학교 3학년이구 김병태라고 합니다.

성함이 …… 』 『현미정이예요』 병태눈에 미정이가 갑자기 달라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 인파속에 묻혀 보이던 미정이가 그 인파를 배경으로 병태의 시야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모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그 나이의 여자치고 귀를 드러낼 정도의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보기 드물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라면 바람결에 보기좋게 날리는 윤기있는 머리를 갖고 있어야 했다.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시간제 탁아모에요. 묻고 싶은게 있는데 고향이 어디에요?』 병태는 더 의아했다.

상당히 붙임성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멋있는 여자를 보고 말이라도 붙이려 하다가도 용기가 없어서 쭈삣대다가 돌아섰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끔 친구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접근하는 방법들을 설명할 때면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만 용기가 없는 병태에게 유용하게 쓰이지 못했다.

『석보면이라고 영양에서 버스타고 들어가요』 타향에서 온 사람들은 상대방의 고향을 묻곤 했다.

같은 지방 사람을 만나면 그 지방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도 대단히 반가와했다.

다른 지방까지 와서 만나는 게 큰 인연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였고 쉽게 서울이란 곳에 정이 들지 않아서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자신의 존재 근원지에 대한 절절한 향수 때문인지도 몰랐다.

『전 함평 출신이에요. 전라도에 있어요. 전 우리 마을에서 천재였어요. 모두들 여대장부라고 했죠. 막상 서울에 올라 와보니까 천재 투성이더라구요. 전 공부와 돈벌이를 같이 하는 가난한 지방학생에 불과하더군요』 병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생활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았다.

병태는 같이 걷다가 무심결에 쳐다 본 미정이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화장기없는 약간 까뭇한 살색에서 단정하게 신은 분홍색 운동화까지 낯익어 보였고 고향 동네에서 국민학교 때 마음에만 담아 두었던 여자애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얼마전 들은 얘긴데 요즘 그집에 O여대생이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영 아르바이트 자리가 안나더군요.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 돈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대학에 와서는 학벌이 중요하다는걸 알게 되었어요』 『맞아요. 살면서 왜 점점 초라하다고 느껴야 하는지』 병태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조의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미정이의 화술에 끌려간 탓이었다.

미정이는 어느 사람이나 쉽게 말문을 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병태는 미정이의 억양이 변화할 때마다 다음 얘기가 무엇일까 기대하고 멋있게 웃어보이려고 애썼다.

그렇게 파란 대문 앞에 도착하자 미정은 병태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앞으로 마주치면 또 인사합니다』 병태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수금을 다녔다.

찐득거리는 날씨에 음료수 한잔 시원하게 먹고 싶었지만 쉽게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숙소에 가면 냉수쯤은 갈증이 풀리도록 먹을 수 있었다.

갈증에 지쳐 조금이라도 그늘진 곳을 찾아 쉬려고 하는데 맞은 편에서 미정이가 유모차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병태는 깜짝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미정은 병태를 못 본 것 같았다.

먼저 아는 척을 하면 상대방이 난처해질까봐 그냥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천천히 걷는 척 하고 있었다.

몇초 동안의 도박이었다.

만약 미정이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면 성공한 것이고 그냥 지나간다면 그건 병태와 미정이와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했다.

병태는 닦지 못하는 땀이 콧등으로 흐르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한여름 땡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어머, 그때……이름이?』 『이게 웬일입니까? 정말 우연입니다』 병태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뻔뻔한 연기가 나왔다.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호들갑스러웠다.

『정말 반갑습니다.

아기가 참 예쁘네요』 병태는 쑥스러워 우유병을 물고 있는 갓난 아이에게 갑자기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아기가 제 맘에 쏙 들어서 일이 수월해요』 아기는 더운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유병을 빨며 방실방실 웃어댔다.

『아기가 갑갑해 하는 것 같고 실은 저도 애와 하루종일 집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잠깐 나왔어요. 금방 들어가봐야 돼요. 주인 아주머니가 하루에 몇번씩이나 전화해요』 미정이는 유모차를 움직이려고 손목에 힘을 주며 몸을 돌렸다.

『저, 몇시쯤 끝나죠? 미정씨하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네?』 미정이는 잠시 당황한 듯 유모차를 잡은 손목에 힘이 풀린채 병태쪽을 돌아보았다.

『별뜻 아닙니다.

그냥 같은 학생이고 비슷한 경험도 많고 그래서 그냥……』 『좋아요』 병태가 얼른 시간과 장소를 제안했고 미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아기에게 우유병을 다시 잘 물려주고 사라져갔다.

그날부터 미정이는 병태의 마음속에 중요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병태는 습관적으로 미정이를 떠올리게 되고 안보면 그리움때문에 담배 한대 물고 뜨거운 가슴을 삭이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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