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안동에서 내려 영양가는 버스로 영양에서 내려 석보면 가는 버스로 갈아 탔다.

7시간 족히 걸리는 귀향 길은 항상 병태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형의 일이 걱정되어 어둑어둑해지는 날씨에 따라 불안감은 더해갔고 노조일이라면 부모님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걱정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암흑만이 동네를 감돌고 있었다.

도시에 살다가 가끔 집에 오면 어둠에 익숙치 않아 눈을 껌벅대곤 했다.

집에 들어서자 밤늦도록 아들을 기다리신 어머니가 뛰어 나오셨다.

『얼굴이 쪼매졌구만 남의 집살이가 여간 아니쟈?』 『머스마가 다 그러구 사는거지. 임잔 뭐 그리 걱정하노? 』 아버지의 퉁명스러움은 여전하셨다.

『전 괘않습니더』 『어찌 한 뱃속으로 낳아도 이리 달른겨? 니성이』 『그노므 얘긴 하지도 마라』 아버진 형의 얘기가 나오자 버럭 화를 내셨다.

『노존가 뭔가 땜시 그런다더라. 뭔지 몰르지만서두 빨갱이짓 하는 거라 하더라. 맞재?』 병태의 예상대로였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냥 걱정 마시라고만 했다.

별일 없을거라고. 쉽게 믿으시지는 않으셨지만 병태의 설명에 안심하시는 것 같았다.

다음날 서둘러 올라오려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좁은 마을에서 병태가 내려왔다는 소문은 발 없는 말이었다.

『학생이 김병태 맞지?』 『네』 『형은 김형태라고 하지?』 형사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웬지 모를 공포가 다가왔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형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 같아 신경을 곤두 세웠다.

『형은 지금 나쁜 사람들 꼬임에 빠져 법을 어기는 짓을 했네. 그러니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다 형을 위하고 집안을 위하는 일일세』 『전혀 모릅니다』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전혀란 말이 어색하게 들려 캐물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걱정되었다.

그냥 모릅니다라고만 대답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데모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형사들은 병태를 심문하는지 형태의 행방을 묻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얘기를 했다.

병태는 학교다니면서 시위를 진압하던 전경이며 백골단이 주는 공포감에 벌벌 떤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들과 동족인 형사의 질문에 쉽게 자신의 생각을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없어요』 『자네도 조심해, 멋모르고 날뛰는 학생들에게 휩쓸리면 인생끝이라구』 마루끝에 버티고 앉아있던 형사들은 병태에게서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한바탕 으름장을 놓고 나가버렸다.

형사가 나간후 병태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한참 멍하니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이왕 내려온 김에 며칠 쉬었다가라고 붙잡으셨지만 병태는 진수걱정이 되어 밤차로 올라왔다.

『병태학생, 이런 얘긴 하긴 어렵지만 이해할거야』 진수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되지 않아 주인아주머니는 병태를 안방에 불러 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을 구했거든』 병태는 당혹스러웠다.

3년동안 시간을 어겨본 적도 없었고 늦게 들어오는 것도 눈치보여 친구들과 밤늦은 술자리도 마다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병태는 배신감이란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모성애라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병태는 그앞에서 당당히 외치고 싶었다.

나도 당신처럼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개가 점점 수그러지고 말문이 막혀 왔다.

『예, 알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되도록이면 빨리란 말도 빠뜨리지 않는 아주머니의 매정함은 예전에 느끼지못한 살벌함도 풍기고 있었다.

병태는 막막했다.

다음 학기 등록금도 걱정인 경황에 거처를 옮기다니, 최소한 자취라 하더라도 보증금이 필요했고 매달 몇십만원을 내야하는 하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집을 보러 다녔다.

몇년사이 엄청나게 오른 집값때문에 병태가 가진 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입주 과외집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고 싶었지만 3년동안 살면서 어느 한 구석 정이 붙지 않은 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일주일을 헤메다가 전신주에 붙은 광고를 발견했다.

○ ○신문 보급소 신문배달원 모집 숙식제공, 월 ××만원 보장 연락처: ○ ○ ○ -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태는 물에 빠진 사람이었고 그 광고는 지푸라기였다.

행운목 같은 전신주를 껴안고 싶었다.

잠자리를 해결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조건이 병태가 서있는 벼랑끝을 평원으로 만들고 있었다.

과외교사를 그만두는 병태에게 아주 미안하다며 웃돈을 얹어주는 아주머니 미소에 치를 떨며 모든 짐을 보급소로 옮겼다.

『기상, 기상!』 새벽 네시. 어김없는 총무의 기상소리와 함께 깊은 잠들을 쫓아가며 일어났다.

보급소의 새벽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 먼저 찾아왔다.

총무의 기상이란 소리는 자명종 시계 소리보다 더 따르릉 거렸고 어느땐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각자의 침구를 정리하고 신발을 끌며 아래층 보급소 사무실로 내려갔다.

『신무ㅡㄴ, 신무ㅡㄴ』 잉크냄새가 풍겨오고 차의 시동소리가 덜덜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무실 밖에 신문이 와있었다.

싸늘한 사무실에 웅크리고 서있던 사람들은 담당구역의 신문뭉치를 안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인사를 나누었다.

『수고해』 『형도요』 병태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길을 달리는 영철이를 불러세웠다.

『왜 그래, 형』 영철은 의아하다는 듯 병태에게 다가왔다.

철 지난 장갑이 병태의 주머니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새벽 바람이 차다.

손 부르트면 공부하기도 힘드니까 껴』 『형도 추울텐데』 『난 괜찮아』 『그래두』 영철은 장갑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장갑을 끼고 병태에게 몇번이고 따뜻하다고 얘기했다.

새벽엔 쓸쓸한 바람이 살속으로 파고 들었다.

찬바람이 직접 와닿는 손 마디마디는 욱씬거릴 정도로 아프기까지 했다.

영철은 고아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한 고아원을 나와 버렸다.

영철이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밤늦게까지 책상에 붙어 있었다.

오늘 새벽에도 책상에 얼굴을 쳐박은 채 있다가 일어났었다.

처음 병태가 보급소 숙소에 들어섰을때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안내해 주던 사람이 영철이었다.

그리고 병태가 다니는 ㄱ대 볍학과에 가고 싶어했다.

법을 공부해서 양심있게 집행하는 법관으로 일생을 살고 자신과 같은 이들을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병태는 영철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병태는 자신의 담당구역을 이제 눈감고 돌릴 수 있을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세번 접힌 신문은 병태의 손을 떠나 정확히 담 너머로 대문 틈 사이로 대문 위로 날아갔다.

등줄기엔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가빠졌다.

마지막 신문을 던지는 순간의 뿌듯함으로 일을 끝냈다.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흩어져 갔다.

멀리서 주홍빛 헤드라이트 두개가 오고 있었다.

첫차였다.

병태는 피고있던 담배불을 황급히 끄고 차에 올랐다.

서너명 밖에 타지 않은 버스에선 유행가 곡조가 차의 진동소리와 엉키며 굴러다녔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만수형이 유난히 긴다리를 걸그적거리며 버스에 올랐다.

얼마전 미용실에 다니는 아가씨와 연애한다고 파마머리를 한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27살이나 된 만수는 안해본게 없었다.

누가 무슨 직업을 갖고 있다면 쉽게 끼여 들어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 놓았다.

만수의 경험에 의하면 신문 배달원 만큼 편한 일자리가 없다는 거였다.

새벽에 일을 하고 나면 오후는 제멋대로 쓸 수 있고 신문수금을 하는 몇 푼은 챙길 수 있고 잠자리와 식사가 해결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만수는 이렇게 몇년 지내다가 보급소 총무가 되고 싶어했다.

병태와 영철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병태는 자신의 거처가 정해지기 전에 잠시 머무는 정도로 생각했고 영철은 대학만 붙으면 당장 방을 옮겨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만수는 매우 단순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 불평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 불평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욕심을 내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게 인간이었다.

때론 그 추구대상이 동일하여 독점하고 싶은 욕망때문에 큰 싸움이 일어나는 법인데 세상에 만수같은 사람이 있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만수형, 그 아가씨랑 잘 지내요?』 『그렇다, 임마! 그건 왜묻냐?』 대답하기 민망한지 얼굴까지 벌개지며 얼버무렸다.

둘은 숙소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숙소식당의 밥이란 엉망이었다.

밥알이 입속으로 들어가도 뭉치지 않고 낟알씩 굴러다니고 시큼시큼한 깍뚜기는 왜그리 큰지 두세번 베어 먹어야 했다.

소금에 절인 김치는 마냥 짜기만 했다.

국은 언제나 미지근한 된장국이었다.

그렇게 병태에게 봄이 가고 있었다.

가끔 꿈에서 형이 나타나 도와 달라고 했지만 자신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묶여있어 옴싹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깨어난 아침이면 갈증이 나서 주전자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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