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당선작]― 무녀리(1)
[중편소설당선작]― 무녀리(1)
  • 이대학보
  • 승인 199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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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인 형의 가출로 병태는…
?우리가 무녀리를 죽이게 될거야? 미정이는 시꺼멓게 말라 엉겨 붙은 아스팔트 위를 걸으면서 병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뛰엄뛰엄 서 있는 가로등이 천천히 등뒤로 사라져 갔다.

하복부의 통증이 걸을 때 마다 심해졌다.

혼자 병원에 갔던 것이 후회되었다.

병태는 어디에 있을까, 같이 있어주겠다고 했지만 요사이 부쩍 힘들어 보여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임신한 후 남자에게 의지하여 울고 난리를 치는 여자들을 삼류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보아 온 탓에 혼자 가고 싶었다.

안경을 끼지 않아 보이는 도시는 온통 네온사인의 번쩍거림 뿐이었다.

모든 간판마다 색색가지 전구가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현란한 무늬를 만들어 냈다.

가끔은 맘도시가 그렇게 보였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가로등이 줄서 있는 모양만 시야에 들어 왔다.

미정은 그때마다 도시에는 가로등만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사람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안을때… 그 노래가 생각났다.

사람사는 세상, 몇 번이나 생각했던가. 세상은 썩어 가고 인간이 살 수 없다고. 운동하는 것은 산소를 만들어 세상을 정화하는 일과 같다고 자신을 다짐하던 순간은 많았다.

그리고 병태에게도 얘기했었다.

난 산소를 만드는 일을 해. 산소를 만들려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해. 그럼 병태가 물었다.

그 인간에 나도 속하는거니? 겨우 그래라는 대답을 뱉어 놓고 혼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에 대한 사랑은 달라. 사소한게 몹시 신경쓰이는 걸. 네가 밥을 굶거나 술먹고 늦게 돌아다니면 걱정이 되서 잠이 안와. 그리고 보급소가 너무 덥지 않은지, 춥지 않은지 등등. 미정이가 생각한 사랑에 낙태는 들어있지 않았다.

애정보다 작아서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비참한 기분만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술을 해주는 의사에게 화가 났다.

애기 아빠가 누구냐고 조심스레 한마디 쯤 물을 거라 예상했는데 『아프실거예요. 집에가서 몸조리 잘하세요』 그게 끝이었다.

미정이를 타락한 여자나 사연 있는 여자로 보는 의혹스런 눈빛은 전혀 없었다.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후들거렸다.

조심했어야 했는데, 후회라는 감성조차 끼어 들수 없도록 통증이 심해졌다.

아… 입에선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철역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그 앞에 도착하면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1. 봄 병태는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자판기동전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철컥하고 동전이 걸리는 소리가 나자 누름판에 불이 켜졌다.

블랙커피라고 써 있는 누름판을 검지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컵이 내려오고 커피가 쏟아졌다.

플라스틱 입구를 젖히고 커피잔을 들어냈다.

커피잔을 잡은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뒷사람에게 자리를 비켜 주고 의자에 않았다.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대었을 땐 손에 들고 있을때보다 더 뜨거워서 마실수가 없었다.

다시 커피잔을 손에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학생관의 벽이란 늘 그랬다.

구호, 동아리모집, 공연 포스터 등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중에 크게 쓴 구호가 그래도 많은 사람들 눈에 띄었다.

5월 9일은 민자당을 불 바다로!!! 「불」자에다가 누군가 이글거리는 모양을 장식해 놓아서 정말 불이 날 것 같은 위험이 느껴졌다.

신입생때부터 낯설게 느꼈던 구호는 3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불바다로 만들수 있을까, 분명 민자당은 멀쩡하게 창당할 것이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이겨야 한다고 얘기한 후 이겼는지 확인하는 법도 없었다.

설사 선이 졌다 하더라도 그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고 분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악이 이길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을 때에도 우연히 한번쯤 악이 이긴 것으로 생각해 버렸다.

늘 패배만 거듭하는 학생들의 싸움에 병태는 그러려니 했다.

5월 9일 까지는 4일이 남아 있었다.

애꿎은 학생들만 몇명 잡혀 가고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악랄한 폭정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나붙은 것이다.

병태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점심은 커피 한잔 뿐이었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간신히 냈고 이젠 2학기 등록금을 모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푼이라도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몇개 하면 충족할 수도 있었지만 입주 과외를 하는 형편에선 불가능했다.

틈나는 대로 진수를 봐주길 바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눈치에 수업만 끝나면 그 집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