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진(도서관학과·4) 길수는 오늘이야말로 주민등록증을 만들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믿고 반장에게 양해를 얻어 일찍 공장을 나왔다.

길수는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린 후 불편한 일을 여러 번 당했었다.

주민등록증이 있을 때에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아 지갑 한쪽에 넣고 다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길수는 별 걱정하지 않았다.

마침 월급 때가 가까왔으니 돈도 몇 훈 없었고, 남들처럼 무슨 카드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이야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물건이라 그냥 액땜한 셈 쳤다.

그런데 당장 그 다음 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위장취업자 소문이 있으니 주민등록증을 복사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반장에게 잃어버렸다고 말을 했지만 여간 뒤가 캥기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회사측에선 노동자들 겁주는 정도로 내린 명령이라 주민등록 사본만 걷은 것 같았다.

또 한번은 같은 반 사람끼리 월급날 공장처녀들과 어울려 디스코 텍을 가는데 미성년자 단속중이니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길수는 신분증이란게 주민등록증 말고는 없었다.

앞에서 들어가는 대학생들은 학생증만 보이고도 잘만 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사소한 것 하나가 없어서 갑작스레 불편해졌다.

그날도 친구들과 웨이터들간의 한참 실강이를 벌인 후 들어갈 수 있었다.

길수는 여유만 있으면 주민등록증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좀처럼 짬이 나지 않았다.

공장 근무 시간이랑 동사무소 시간이랑 엇비슷했고, 주민등록증이 공장 근처 자취방으로 옮겨 있지 않고, 집근처, 서울의 위성도시에 있었다.

그러던 중 지방자치제 선거일이 휴일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꼭 그날은 투표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길수에게 문제는 주민등록증이었다.

당연히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투표를 할 수가 없었다.

길수는 이번 기회에 선거일 전날 반장에게 일찍 끝내달라고 양해를 구해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지자제 선거일 전날 공장은 한바탕 소란이 났다.

노조간부즐이 지자제 투표에 참가하지 말자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댔다.

기만적이니,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니 절대 참가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던 노조문화부장이 길수를 붙들고 얘기했다.

『XX 당의 독재 기반이라고, 절대로 투표해선 안되네. 참가율을 낮춰 저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한다니까』 길수는 투표야 어쨌든 주민등록증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주민등록증만 만들고 투표는 하면 안 되네.』 길수는 그것보다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급했다.

평소보다 일찍 공장을 나와 서둘러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영등포 역에서 복잡한 도심을 빠져 나가는데 교통체증이 시작되었다.

집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려니하고 버스를 탔는데 차가 서행을 하다가 결국 멈추었다가 섰다 하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투덜거렸다.

길수도 자꾸만 초조해져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겨우 도심을 빠져 나오며 차는 제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동사무소 시간을 30분 지나서야 길수는 버스에서 내렸다.

길수는 내일이 투표일이란 것은 최대한 활용해서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으려 했다.

동사무소는 문이 닫혀있었지만 두드리니 얼른 사람이 나왔다.

『주민등록증 하러왔는데요.』 『담당이 퇴근했습니다.

』 『내일 투표하려면 주민등록증이 이썽야 하잖습니까?』 길수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투표의 신성한 권리를 수행하려는 국민처럼. 『내일 투표 안합니다.

』 『네? 투표를 안하다뇨, 내일 지자제 선거일 아닙니까?』 『모르셨습니까? 무투표 당선입니다,』 길수는 동사무소 직원의 친절한 안내에 어정쩡한 미소로 돌아서다가 뭔가 울컥하고 치미는 바람에 눈에 들어오는 돌맹이를 힘껏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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