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이!』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한걸음에 뛰어온 수연이는, 약전 골목으로 들어서자 숨이 찼다.

「감초당 한약방」샷시문을 열기도 전에 저만치서부터 할머니를 불렀다.

『아니, 이게 수연이냐 수진이냐!』 『여기가 뭐 남의 집이냐? 그렇게 서있게. 어서 들어오너라, 어서.』 『참, 할머니! 약방에 새로 누가 왔나 보죠?』 수연이는 자꾸만, 할아버지 옆에서 함께 약을 짓는 여자에게 눈길이 쏠렸다.

『으응­박양 말이냐? 으휴, 말도 마라, 내가 쟤 때문에 속병이 났지.』 『박가라면, 우리 종친 아니예요?』 『종친은 무슨…, 밀양 박가라더라.』 할머니는 행여나 그런 소리 들을까봐 겁난다는 투로 얼른 수연이의 말을 가로채셨다.

『아, 요전 월요일밤에 보따리 하나만 날름 들고 들어오더라. 내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다짜고짜 여기서 일하겠다고 막무가내지 뭐니? 저번 애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더니 걸레질을 하구 쓸구 야단을 떨더라, 어지간히 날이 저물었는데 가라고 할 수도 없구…….』 『할머니도 참. 그동안 약방일 할 사람 구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어요. 잘 됐죠 뭐. 더구나 여자분이니 이제 빨래 안하셔도 되구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쉽게 나가버리지도 않겠네요. 새벽마다 할아버지 혼자서 밭에 다니시느라 여간 힘드셨어요?』 『얘, 그런 말 마라. 살림은 니 작은 에미가 와서 다해주고 약방일이야 내 동생이나 작은 애가 와서 하는 것만도 족하지, 사람 하나 둬봤자 괜히 돈만 축내고 속만 썩이고…. 다른 건 다 참아도 사람 싫은 건 못 참는다고 걔 하는 짓이 어찌나 얌통스럽고 밉쌀맞은지 원.』 할머니는 이제껏 참으신 것만도 용하다는 듯이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신다.

그 때, 인기척이 나더니 수연이 작은 엄마가 들어오셨다.

『얘! 박양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밭일하고는 또 지네 집으로 약 캔 것 부치대?』 『네 어머니. 그런 것 같던데요.』 작은 엄마는 요전 일을 고자질 한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던지 말끝을 흐리셨다.

『글쎄, 그렇다구 그러면 그렇지. 그까짓 약 몇 푼된다고 얘기라도 하면 누가 뭐래? 얘 할아버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걔한테 잔소리라도 할까봐 몸을 사린다는 거야. 고작해야 우리 수연이보다 서너살 더 먹은 손녀뻘 되는 애한테 왜 그리 벌벌 떠시는지…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어여 일어나서 수연이하고 얘네 집이나 가봐, 슬슬 오늘밤 제사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아녜요 할머니, 전 괜찮아요』 수연이는 모처럼 할머니 얘기에 재미가 쏙 들은 참이었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으시고 조용하셔서 웬만한 일에는 큰 소리 한번 안내시던 할머니가 오늘은 어쩐지 이상해 보였다.

『그 애가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애 할아버지한테 어찌나 아양을 떠는지 눈꼴 사나워 못 보겠어. 내가 옆에 있는데도 식사때면 얘 할아버지 숟갈을 집어서 요로구 받쳐들구 있질 않나, 밭에 갈 때면 쪼그리고 앉아서 신발까지 신겨드리는 거야』 할머니는 수연이에게 가끔 눈길을 주시면서 수연이나 작은 며느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럴 수가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내심 흡족하신 모양이셨다.

수연이는 속으로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할머니가 질투를 하시는 건 아닐까?」하는 예감이 들었다.

『내 평생 시집와서 이날 이태껏 일하느라고, 허리 다치고 병 생기고 해도 따뜻한 말 한번 안하던 양반이 언제 봤다고 그애 한테는 그리 마음을 쓰시는지……』 할머니는 목이 메시더니 눈에는 눌물이 글썽이셨다.

순간 방안은 금세 엄숙해졌다.

수연이는 애써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흔 고개를 넘으신 할머니가 질투를 하심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