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현장」의「돈놀부전」

「돈놀부전」은 웃음과 해학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관객은 이 「돈놀부전」을 통해 해묵은 체증을 내리는듯한 시원함을 맛보게 된다.

성은「돈」이요, 이름은「놀부」인「돈놀부전」에서 우리는 쉽사리 욕심많고, 성질 못되고,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놀부의 전형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기에 자칫 권선징악의 설화「흥부전」으로 전락해 식상하게 끝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돈놀부전」은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놀부의 성이「돈」이 됨으로해서 그가 자본가의 상징이며 노동자의 적대자임이 상대적으로 드러난다.

면상에 철판깔고 배때기 툭 내밀고 낙엽떨어지는 꼴새만 봐도 지폐인가 의심하는 성품의 돈놀부는 과거 놀부보다도 간사함과 재빠른 이해타산을 겸비한 대통실업 사장이다.

끊임없는 이윤축적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정경유착을 실현해 가는 현시대 자본가의 대표적 형상을 돈놀부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돈놀부전」에서 사회자(판잽이)는 극의 주도를 맡아 관객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관객에게 문제제기를 하게 하는 등 극을 자유롭게 진행시킨다.

우리가 목숨바쳐 사수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 민주노조, 무노동무임금의 논리가 왜 허황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짐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모색한다.

즉 관객을 노동자의 한편으로 끌어들여 극에 참여시킴으로써 마당판은 한결 생동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돈놀부전」은 진행에 있어 매우 빠른 속도감을 지녔다.

극중인물 중 고정배역을 맡을 인물외에게는 1인다역을 시킴으로써 다양한 인물전환을 용이하게 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의 자연스런 배치라든지, 창과 산파조가 한 곡조에 공존하게 한다든지, 노래와 춤과 사물패의 가락이 함께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속도감을 가진 마당극의 특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돈놀부전」은 민자당 창당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이 장면은 풍자의 극치를 보여준다.

미국의 부시, 1노2김, 정회장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탈을 이용, 인물들의 3당 합당 과정에서 보여준 야합행위를 여과없이 그려내고 본질적인 성격을 강하게 노출시켜 관객에게「맞아, 저랬었지」를 연발하게 만든다.

정치판에서의 전형적 성격을 그대로 대표하고 있기에 감탄은 더욱 크다.

「돈놀부전」을 공연한 극단「현장」은 말 그대로 현장의 순회공연을 목적으로 한 노동연극단체이다.

하지만 이「돈놀부전」에서는 현장의 치열함이나 노동자의 투쟁이 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은 적다.

일제시대 친일파, 미군정기 미군의 하수인, 3공시절 정경유착의 대표자로 색깔바꾸기를 밥먹듯 하던, 아버지 돈군보뒤를 이어받아「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어림없어」를 외치는 사장 돈놀부와 민주노조사수와 노동법개정을 외치는 노동자의 대립을 기본축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극적대립이나 투쟁상이 사실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이 극이 상황극이 아니라 풍자극으로써 모순이나 갈등 상황을 과장된 표정으로 웃음을 통해 상쇄시켜버리고 문제를 해학적으로 풀어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또 흥부(대체로 노동자를 상징)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놀부의 자본가적 논리에 중점을 두고 있기에 노동자의 투쟁의식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돈놀부전」은 많은 주제를 한 극에 무리하게 모아놓음으로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흥부전」을 재창조, 현대적으로 해석해 풍자의 미덕을 돋보이게 했다는 점은 매우 높이살만하고, 신선함을 주었다.

이 연극을 통해 자본가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우리 노동자들은 왜 싸울 수 밖에 없는지를 웃음으로 깨달아 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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