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미(독어독문학과 2) 홍역으로 죽은 돌쟁이 막내동생의 무덤에서 먹다 남은 고구마와 들꽃 묶음을 놓고서 두다리를 뻗고 울던 아버지, 시골에서 게를 자루에 넣어 하루걸려 온 도시 친척집에사 비러 쓰레기통으로 버려진 나의 왜소함과음성행, 여덟 아이들을 위해 주일날 일한 것을 부끄러워 하던 장로님의 비행과 추방. 이러한 「키작은 자유인들」이 모여사는 세상은 바로 지금, 이자리, 우리들이 숨쉬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고상하거나 권력을 추구하는 「위인」들이 아니다.

그저 몇몇 잊혀지고, 기억속에서 가물거리며 음회되거나 인화되지 않은 필림들 마냥 부옇게 흐려져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사실 화자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귀신과 도깨비와 절친한 김씨 영감이나 고집스럽고 상이군인의 위용보다는 어려운 젊은이를 재치로 군용을 탈출시키는 모험을 하고도 빙긋이 웃어 넘길정도의 초월적인 여유를 지닌 규순청년에게서 진실을 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뭇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거인의 위압보다는 키가 작아보이는 왜소함 속에서 은근히 풍겨내는 「누구보다고 더 참되고 분명하게 소중스러운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존경했던 장로나 선생은 의혹과 불신과 원망의 대상이 되어 자유인과 대립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잘 읽어보면 이들의 악한 측면도 포용하는 진실이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작품들속에 이웃어른이 절친한 친척을 고발하는 일화를 소개한 후 화자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한다.

『인자하고 관용스러운 사람에게서, 더러는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에게서, 심지어는 지극히 숭고한 지성과 신념의 사람들에게서 마저 언뜻언뜻 그 저열스런 불신의 얼굴』이 보인다고 하면서 선과 악의 상대성의 인정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기억의 잃어버림과 자아망실, 현실부정을 거치면서 아이러니의 기교를 통해 새롭게 「자아회복」의 출발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소설창작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볼때 80년대 중반이후 민중문학, 특히 생산계급문학의 돌풍적인등장이후, 다소 경직된 인상을 풍기는 일종의 편파성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뜻있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보면 주변의 「지금」-노동계급과 제도적 폭력-을 돌아보기에도 바쁜데 잊혀지거나 죽어버린 부모, 이웃, 역사를 기억하는 단순한 추억담이나 에피소드가 무슨 소용이냐는 볼메인 소리도 있겠지만, 작지만 위대한 우리의 주변 이웃들이 주는 잔잔한 감동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이 작품의 가치를 두고 싶다.

결국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인 것은 문학의 내적공간 속에서의 사변적인 성찰의 결과 외에도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총체적인 현실성의 충실한 반영에서도 개인들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들에 대한 충실한 작가적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록 비관주의적인 색채가 보이거나, 역사의 전과정에서 사실에 대한 판단의 흐려짐등의 잘못이 있다해도 다양한 양식의 집요한 탐색이나 연륜이 만들어준 세상에 대한 안목이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주는 탓이다.

물론 이러한 공감은 작가가 고백하듯이 임시기류와 같은 도회의 삶이나 고향에서 발견하는 타지인같은 면구스러움이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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