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활의 노래」

광주민중항쟁을 그린 영화 「부활의 노래」가 제도권 상업영화와의 경쟁을 서두르다 예상치 못한 상영봉쇄로 좌절될 위기에 처해있다.

대학동아리나 영화운동소집단에 의해 광주항쟁, 노동조합, 교육문제 등의 소재가 8미리나 16미리 소형영화로 다루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35미리 대형으로는 처음 제작된 것이라 일단은 고무적인 영화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사거부로 제도권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재확인하게 하였다.

제도권 영화에서는 꺼려지는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삼으면서 개봉관에서의 상영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으나 그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큰 파급력에 상응할 수 있는 작품성과 완성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오히려 주제를 흐리게 하고 사건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부활의 노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이 영화는 80년 광주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실제 사건과 인물들로 역사적 의미를 형상화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총 8장으로 작품을 분류하여 각 장을 작은 부제 아래 구성하였고,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광주 항쟁 당시 활동을 같이 했던 「들불야학」생이며 노동자인 박기순의 삶과 죽음에 촛점을 맞추었다.

1장 「갈등」에서는 유신과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당시 사회상을 표현하였고 5장 「아! 오월의 그날」은 5월 28일 계엄군과 시민군의 최후의 결전을 그렸으며 8장 「내일을 위해서」에서는 야학재건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러한 진보적 소재와 인물설정에도 불구하고 치밀하지 못한 극의 구성과 관념적 민중지향성으로 주제를 흐려놓았고 광주항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사회의 첨예화된 모순의 실증 - 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조차 관객에게 던져주지 못하고 말았다.

유신과 계엄령 선포 등 당시 사회상황을 신문과 사진 등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이 시민들과 학생들을 어떻게 분노시켰고 항쟁으로 불붙게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으며 단지 광주의 문제는 과거의 사건으로 묘사될 뿐이다.

또한 인물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킴으로써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등장인물의 영웅화에 촛점이 주어지는 결과를 낳아 5월 학살의 진상은 가리워 나타내지 못했다.

민중항쟁은 몇몇 영웅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힘이 원동력이 되는 역사인 것이다.

때문에 「부활의 노래」는 보여주고자 했던 광주항쟁이 본질에 미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또한, 대중성을 얻기 위해 삽입한 듯한 주인공들의 사랑 얘기는 사건 진행의 심각함에 비할 때 과장된 행동으로 부담감마저 주었다.

이제 폭도에 의한 반란이 아니었다는 차원의 광주항쟁의 평가만으로는 대중들을 더이상 영화관에 붙들어 놓을 수 없다.

그러나 검열제도 통과와 제도권 내의 진입이라는 점 만으로도 영화 운동집단 뿐 아니라 영화계를 흥분시켰던 「부활의 노래」는 진보적 영화운동에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이며, 공연윤리위원회의 편법의 대상이 됨으로 해서 영화운동내 새로운 변화·발전을 기대해 보게 한다.

광주항쟁의 소재를 제도권 영화안에 끌어들이는데만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기존의 상업주의 영화에서 벗어나 영화의 건강성을 획득하고, 자주적인 영화건설을 위한 움직임이 제도권 안에서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지 지켜보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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