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 김남주시집, <바람에 지는 꽃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조국은 하나다』, 남풍출판사. 이화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선교사업이 중심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해 1900년경부터 사회봉사를 위한 자치단체가 결성됐다.

선교회 조직을 바탕으로 농촌사업, 문맹퇴치, 빈민규제 사업 등을 벌였고, 1916년에는 인도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러시아 피난민과 문둥병자를 위한 광범위한 자선사업 및 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계몽운동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교내나 서울근교에서, 방학 때는 자기 고장이나 농촌지방에서 위생과 생활개선을 위한 활동 등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후 이러한 사업은 일제의 압박과 방해에 의해 중지되기도 했고, 일본군의 위안부격인 정신대에 지원을 권하는 박인덕, 모윤숙 등의 名士가 있었지만, 해방 후 혼란한 시국에서도 계몽대는 영구적이고 합리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준비했고, 특히 1960년대 4·19에 불참한 사실에 대한 자성과 사죄의 의미로 이화 전체가 농어촌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당시 이화학당하면, 올드미스가 많은 것으로 평판이 높기도 했는데, 독신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봉사하는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으며 졸업 후 봉사가 상식처럼 되었다 한다.

국외적으로도 활동범위를 확산하여 파키스탄에 선교를 하기도 했다.

이후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자 반대시위로 협정에 반대하는 데모와 단식농성과 이를 저지하는 곤봉과 최루탄이 학교 안에 가득했지만, 평화적인 의사표현으로 〈이화호〉라는 경비정 마련을 고안하고, 2년 동안 모은 돈으로 20톤 급 경비정을 마련했다.

이는 1967년 부산 부두에서 진수식을 거행해 그동안 실추됐던 이화 미지를 재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69년에는 3선개헌반대 움직임 속에서 이대는 흰블라우스와 검정스커트를 입는 운동을 벌였고, 70년 11월13일에는 수출주도와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이루어진 근대화의 그늘에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학생들은 소외계층과 민중에 대한 인식으로 관심을 가진다.

72년 유신헌법 반대 등은 "독재에서 야기되는 사회의 부정부패일소"라는 기치아래 본교뿐만 아니라 전국대학생이 하나로 뭉치는 기회가 되었고, "대학문화"라는 용어가 통용되었던 시기라 한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 후 학생들은 유신철폐를 부르짖고, 끊임없는 시위와 긴급조치, 휴강의 악순환으로 학교 안은 "눈물의 이화교"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다.

유신 선포 이후에는 민주와 자유를 열망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반공 이데올로기 에 의해, 좌익세력에 의한 것으로 날조되어 학생들은 깊은 타격을 받았고, 전국민의 민주에 대한 열망을 깡그리 묵살했던 정권은 부마항쟁과 10·26을 맞아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이 땅의 민주·민중·민족이라는 이념을 구체화시켜 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화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철야기도와 단식기도, 검은 리본 달기 등의 투쟁형태로 많은 학생들의 참여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자세를 모색하면서 이대에서는 78년 개인의 우상화와 여성의 觀賞化에 반대하여 메이킨 선출을 거부해 이화 대학 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그러나 암울했던 사회에서 대학은 자율권이 없어졌고 , 최루탄과 곤봉으로 얼룩진 학내에는 양극화현상과 무관심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10·26 이후 80년 5월에는 격변하는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대학들은 학원자율화와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실천들을 다양하게 찾는데, 그 과정에서 대학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以上은 이화설립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사회와 민족운동의 대열에서, 사회 불의에 항거하는 새로운 전통창조를 찾아 나섰던 이화의 모습을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다.

현재 정치권력이나 사회 지도자로 나선 여러 人士들도 이 속에서 싸웠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있는 힘껏 싸웠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분들이 남기고 간 개개인의 치열한 열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나라 역사의 강물을 흐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변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들의 자세는 결코 결과주의에 따른 평가로 내팽개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이런 시기를 즈음해 1984년도 대학을 입학한 나의 친구는 그 때의 봄날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4월 말경이나 5월이 되면 연한 초록빛 잎들이 뻗어 나오면서 파스텔 색감의 학교 교정의 봄빛에 취해있기 좋았지만, 그 사이로 휘날리는 버들가지나 민들레 씨앗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 이를 두고 그 친구는, 구더기들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이런 봄이 싫다, 몸서리가 난다고 했다.

그 봄은 우리들의 바람과 풀잎을 내몰고 가버렸다.

『96년, 이화의 발자취를 돌아본다』(이대학보, 1982년5월31일, 717호), 『시대의 향기, 여성교육의 첫걸음(이화 1886-1910년)』(이대학보, 1986년4월7일 818호), 『역사의 굴곡 속에서 피다만 민주의 봄(이화 10·26-5·17)』(이대학보, 1985년5월20일, 796호) 『어둠의 장벽 가르는 실천적 지성의 의지(이화 해방에서 10·26)』(이대학보, 1985년5월27일, 797호, 10면), 『깨어나는 이화문화의 맥』(同年月日, 同面) 등을 읽고 썼다.

* 원래 이 글은 「사월에 울려 퍼질 梨花의 노래(Ⅱ)」로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학보사의 이러저러한 문제로, 개인의 이러저러한 문제로 시기를 놓쳐 버렸다.

이대에서 4·19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간에 4·19 주간이 있어 그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제목이 사월 노래 Ⅱ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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