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겠다고 약속을 해 두었으니 일어나야 한다.

지금 서두른다고 해도 수업시간의 절반 정도가 지나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요란을 떤 행동이라고는 처음 침대에서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 침대 안쪽으로 이불을 확 밀어내며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을 때 뿐이다.

평소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시계를 보고, 여유시간이 있던 없던 5분 정도 눈을 더 붙이고 마음 속으로 100정도를 세며 무조건적인 여유를 부리다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곤 했다.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그저 파묻혀 있고만 싶은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방법은 이렇듯 모진 결별밖에 없었다.

그 다음의 절차들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때의 응축된 긴장을 보상하듯, 나에게는 그저 정상적인 속도를 유지한 것이었지만 다름 사람의 눈에는 꽤나 느린 호흡으로 이루어졌다.

샤워를 하고, 입을 옷을 고르고, 여유가 되면 이침식사를 하는 이 모든 순서들이 일어나기 전 침대 안에서는 그저 귀찮은 일로 생각되기도 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바깥 세상과 만나기 위해서는 말끔한 옷을 입어야 하고, 적절한 수준까지 몸을 청결히 해야 했다.

정 귀찮다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을 것이 분명한 그런 일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난 현실을 흘려보내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다.

그 안에 묻혀서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도록 그들이 갖춘 조건을 거의 수용하였다.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머리와 옷차림으로 다듬는 일은 내 개인 취향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해야 가상의 필터를 써가면서 차단시킨 현실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거나 기억에 담아두게 하는 일은 결국 현실 세계가 나에게 간여할 가능성을 높여 놓는 일이었다.

그 시선이나 기억이 자주 부딪쳐야 하는 주변인들의 것일 경우에는 이미 그것은 현실 세계에 의한 간여가 되어 있었다.

나와 접촉했을 때 그들이 보낸 시선이 기억으로 응축되고 이것에 나를 향한 평판 및 행동 방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외출준비는 타율적이고 구속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실제가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외출 준비에 시간을 들이는 이유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라기보다는 , 오히려 그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외출준비는 그 자체가 외출에 대핸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기대보다는 안심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겠다.

현실과 접촉하기 용이한 모습으로 준비하는 행동은 사실 그 안에서 즐길 만한 요소가 아주 없지 않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샤워였다.

샤워기의 물을 세게 틀어놓고 온몸에 부딪치는 물줄기를 느끼는 것, 그리고 사워젤로 한껏 거품을 내어 몸에 바르고 그것을 다시 씻어내는 일은 아침의 어김 없는 기쁨이었다.

달콤한 과일향이나 톡 쏘는 스피아 향, 욕실의 수증기 그리고 물줄기가 벽과 바닥으로 부딪치는 소리는 미열과 가상의 필터 대신 훌륭한 차단막의 구실을 했다.

샤워를 위해 욕실 문을 잠그는 순간, 그곳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바깥 세상이 어쩌면 조금은 만만한 곳이 되어있지 않을까, 익숙한 곳이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이 수증기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물론 그 희망은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가운데 열기가 가라앉으며 차츰 잦아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그 이후, 신발을 신고 나설 때까지는 필터나 차단막 등에 대해 보다 긴장을늦출 수 있었다.

진호라면 이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이지, 나처럼 시간을 이완시키며 즐기는 일을 함부로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외출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외출 준비는 준비일 뿐,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 만큼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샤워를 마친 직후, 그를 조금이라고 염두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와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내 미열이 심각한 증세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늦게라도 수업에 들어오는 것 이상으로 기대의 수위를 높이지는 않을 것이다.

난 그가 무척 영민하다고-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