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좀 있다는 말은 핑계가 아니었다.

늘 있는 미열이 달갑지 않은 아침의 외출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방해가 싫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몸져 누울 정도로 앓아보고 싶기도 했다.

미열처럼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몸의 이상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아픈 것"이고 그로부터 동정과 쾌유를 위한 격려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그 정도가 지금의 나에게는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런 병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동정이나 쾌유를 비는 격려 등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세상으로부터, 현실로부터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며칠이나마 절연되고 싶은 바람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지금의 미열도 세계와의 절연이라는 기능에서 아주 무관하게 작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가 세상과 소극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온 사람들은 내가 미열을 앓고 있다는 점을 질병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결석이나 조퇴가 잦다는 점 혹은 단체활동에서 자주 이탈한다는 점을 이해해주곤 했다.

고등학교 때, 정확히 말해 아버지의 죽음과 지금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 이후로 미열이 찾아왔다.

세상과의 접점에 놓인 필터처럼, 그것은 그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과 주변이 그저 희미한 환영처럼 다가오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몸이, 나름대로 환경변화에 근사하게 적응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튼튼하고 단단한 신체로 현실과 부딪쳐야 세상의 예상에 들어맞는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가슴 속에 가득 품곤 했다.

물론 그 꿈은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번번히 깨지곤 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심해지는 미열, 그로부터의 고통이 깨진 꿈으로부터 비롯될 다른 정서들을 차단시켰다.

이렇게 기특하게도 나의 몸은 도저히 마주할 용기도, 그것을 원하는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나름의 적응기제를 만들어냈다.

다소 열에 들뜬 눈에 비친 세상은 따뜻해 보이기도 했고, 사람들은 다들 유쾌해 보였다.

아침을 지날수록 미열은 호전되었다.

그 때서야 사람들이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 유쾌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에게 간여하려 하고, 나를 제약하려 했다.

나를 차단시키던 몽롱한 열기는 그 힘을 점점 잃어간다.

이에 대해 나는 처음에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미열은 심각한 질병이 아니었고, 아침을 정점으로 조속한 쾌차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늘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은 미열이 더 이상 필터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부터 난 내 스스로 장막을 쳤다.

질병으로부터 익숙해진 제스처와 포즈로 이루어진 장막이었다.

물론 그 장막은 가상의 것이었기 때문에 본래 장막이었던 미열이 내게 주는 효과는 가져다주지 못했다.

가상의 장막 안에서 나는 사람들의 유쾌해 보이는 몸짓 안에 숨어있는 고단함과 슬픔을 엿보게 되었다.

이렇듯 가상의 장막은 내게 부딪치는 현실을 막아내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주어진 것 이상으로 내게 적극적으로 공세 하는 것을 차단하는 구실은 했다.

나는 가상의 장막 밖에 존재하는 그들과 같은 세계를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세계와 싸워나가는 만큼 나를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열에 들뜬 약한 존재였고, 이런 인식이 나의 비껴섬과 나태함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비껴섬으로써 비어버린 내 몫의 의무를 누군가 대신 해주기도 했다.

진호가 내게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진호가 내 미열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애의 영민한 눈이 반쯤은 가상인 장막의 존재를 꿰뚫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진호는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영민하기 때문에 모른척 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유지를 위해서 우리는 서로의 이질적인 부분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진호의 그 이질적인 부분이 마음에 든다.

그 애도 자신과는 다른 나의 부분들을 마음에 들어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 비난하지도, 상대방의 것을 닮아가려는 노력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호의 계산적인 면, 현실적인 면이 나에게는 신선했고 또 나에게는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난 그것들을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진호와의 관계를 통해 그것들을 취하고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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