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강의실에 내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드르렁 드르렁. 재빨리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진호였다.

"나 지금 일어났다.

오늘 수업은 아무래도 못 들어가겠어. 새벽 네 시에 잤다.

열도 좀 있고......"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그는 그 사이에 잠시 침묵을 걸쳤다.

그가 그저 게으르고 나태한 대학생의 전형이고, 내가 그저 구차한 우정에 친구를 끌고 다니는 극성으로 일관했다면 대화가 이렇게 여백 있게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호의 입장이라면 새벽 네 시에 자게 된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밀며 나에게 자기 몫의 수업 프린트물과 노트필기, 그리고 이왕이면 교수에게 결석을 합리화할 변명도 제공해주기를 부탁했을 것이다.

야 내가 맛있는 거 한 번 산다, 그러니까 이번만 부탁해. 이 수업 성적 제대로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잖아......아니면 내 쪽에서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서핑으로 밤을 지샜을 거라고 넘겨짚으며 친구에게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고는 맛있는 밥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친구 몫의 수업 프린트물과 노트필기, 그리고 교수에게 둘러댈 비장의 핑계거리를 약속했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 이렇게 오가는 거래는 내 입장에 선 쪽이 밑지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진호 쪽 친구가 밥을 사게 되더라도 지난 번 수업에 한 번 빠졌을 때 네가 해 준 노트필기가 고마워서라는 구실은 오히려 막역한 친구 사이에는 어색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나와 진호 사이에는 괄호 속에 묶여 있었다.

그가 애걸복걸 매달리지 않아도 내가 먼저 알아서 그가 바랄 법한 일들을 원래 내 일이었던 것처럼 말없이 해 주었다.

진호는 자신이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필요했던 일을 내 쪽이 해준 것에 대해 댓가는 지불하였다.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내 몫까지 계산하며 그는 네가 지난 번에 대신 해 준 노트필기에 대한 고마움으로 밥을 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것들이 그와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길들여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볍게 베푼 호의가 뜻하지 않은 댓가로 이어지는 경우 호의를 베푼 자는 호의에 대해 은연 중에 댓가를 기대케 되는 이상한 덫에 걸릴 수 있다.

하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베푼 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 덫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기대치 않은 호의를 경험한 자는 같은 상대에 대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비슷한 호의가 다시 따라오지 않을까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진호에게는 현실에 발을 담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귀찮고 성가신 일이 누군가에 의해 대신 처리된 것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댓가로 우정을 가장한 우리의 관계를 묶어두려 하였다.

내가 바란 관계 또한 이런 형태였기 때문에 기꺼이 그 안에 편입되었다.

"일단 수업에는 나와. 지난번에도 빠졌잖아. 니가 늦게라도 나와야 교수한테 변명기도 쉬워질 테니까." 그는 또다시 침묵을 놓다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 나는 번잡한 현실로 자신을 끌어내는 하나의 끈이었다.

그 끈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거래에서 기우는 쪽은 나였다.

그러나 나는 손해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학생식당에서 밥 한끼 얻어먹는 정도의 댓가를 가지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우리 관계의 성격상 맞지 않는다.

그는 내 호의에 길들여졌고, 나는 그의 댓가에 길들여졌다.

정서적이지는 않지만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관계는 그럼에도 내 쪽을 향한 승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진호는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게으른 친구에게 헌신적인 우정을 가장해가며 이 관계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잘생긴 이에게 애착을 가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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