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아홉 번째 페미니즘 문화제 ‘2004 가족다반사’와 관련하여 지난 주 학생문화관 로비를 지나가다 우연히 ‘2004 가족 다반사’라는 이름 하에 열린 교내 페미니즘 문화제의 내용들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필자는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품고 살아온 ‘정상 가족’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기대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위험하며 원래부터 철저하게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 뿌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연히 지나치며 보게된 그 때 그 문화제의 내용들은 순식간에 필자에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온 소수의 여성들과 이제껏 ‘가족’이라는 이름의 테두리로 보호받지 못한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필자가 너무도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정말 철저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였다.

우리 사회는 우리 고유의 단일하고 우수한 것과 그와 이질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에 너무나 오랜 시간 젖어 있었고, 그런 한 가지 예로서 우리 머릿속에 깊숙이 뿌리박고 서 있는 ‘가족’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범답안 이외의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 속에 모범적인 가족의 형태는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양부모와 그들의 직계 자손인 아들과 딸로 구성되는 혈연 공동체를 가리킨다.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가족들의 형태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가족하면 떠오르는 이런 자연스러운 연상 법에 대하여, 사회가 정상이고 건강하다 판단한 가족의 모습에 대하여, 자칫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필자와 같이 어떤 크고 작은 계기에 의하여 이것이 모든 가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 엄청난 위험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

다시 한번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람들만이 우리의 독특한 문화 속에 자연스레 공유하고 있는 한국적인 현상을 하나 발견한다.

마치 전시 체제에서 적에게 갖는 적대감과 맞먹는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깊고 잔인하게, 우리는 우리가 올바르고 정상적이라 받아들인 어떤 한가지 모습과 다른 모습의 것들을 철저하게 매장시키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는 그런 ‘정상적인’ 모습과는 다른 많은 가족들의 형태를 ‘비정상적’이고 건강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위험한’ 현상이라고까지 한다.

비단 가족이라는 문제를 벗어나 모든 사회 문제에 있어서, 사회 전체가 그런 이데올로기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이어서 법과 체제가 그림자처럼 그것을 따르고 그렇게 흘러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 별 의심 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경우, 그로 인해 사회의 관심과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된 소수의 사람들이 겪게 될 피해와 우리의 잘못을 깨달을 줄 아는 감각마저 상실해 버린 이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요새 정치계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탄핵정국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가족’의 개념에 빗대어 표현하곤 하는 곳곳의 소리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특히 우리의 보수 층이 무의식중에 얼마나 ‘가족’에 대한 왜곡된 이해들을 강요하고 있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는 한국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의 위기에 내몰린 현실은 곧 한 집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을 의미하고 대통령을 잃고 혼란스러워 하는 온 국민은 곧 결손 가정의 복잡한 상황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아이가 될 뿐이다.

그런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온당 있어야할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만이 결핍이 아니다.

부모만 있고 자식이 없든 지, 부모가 이성이 아닌 동성 이든 지, 어머니가 아이를 나을 수 없다거나,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것 모두가 그들에게는 정상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결핍 상태이다.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서 정상적인 가족으로 여겨지는 가장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다른 가족의 존재를 가족이라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반역이며 혁명이고 따라서 그 외의 것들은 사회 전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척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자신의 안정적인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에 반하는 요소들에 대해 더 강한 거부감과 위기감을 드러낸다.

이번 페미니즘 문화제를 통하여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지난해 11월 경 다수의 일간지에서 이슈화되었던 ‘이대생들의 출산 기피 현상’은 한국 사회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야할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않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가족들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너무나 큰 위기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시나 당시 기사 목록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일간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이대생 200명 중 약 30%가 결혼 후 자녀계획이 없다고 답한 결과’에 대한 사회 전체의 ‘충격과 걱정의 눈빛’을 다루고 있다.

당시 이대생 10명 중 3명의 학생이 그런 대답을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성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질서의 현주소와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는 젊은이들의 점진적인 변화 패턴을 읽을 수는 있을망정, 마치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한국 여성들이 마치 당장이라도 모두 아이 낳기를 거부할 것처럼 일반화시킬 필요도 이유도 없다.

또한 이 때 설문 대상이었던 이대생 200명은 전체 여성을 대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 관한 전반적이고 현 시안 적인 관하여 많은 여성들 중에 단지 하나의 지적 공동체일 뿐인 이화여자대학교 내의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를 가지고 출산율 저조라는 사회 전체적인 변화로 확대 해석한 것 역시 명백한 잘못이라고 본다.

또한 그 기사를 보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형태의 가족들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가 미래에는 해체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고 위기감을 조장했을 우리 모두의 의식 구조 또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논리 속에 상당히 무뎌져 있는 듯하다.

설문에 참여한 200명의 꿈 많은 젊은 여대생들이 미래에 단지 한 가정 안에서의 어머니로서 혹은 아내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관념 혹은 의무에 앞서서, 각자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전에, 그들의 생각을 요약해 놓은 단 한 줄의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치 그것이 사회 전체의 위기를 초래하는 위험한 현상이므로 하루 속히 대책을 세워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 우리가 마련해 놓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우리 사회가 규정한 ‘정상’이라는 것이 과연 세상 위에 특정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도 극명하게 다른 한 편을 배제한 채 기형적으로 이루어져버린 논의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가족의 문제를 넘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길 원하고,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닮지 못한 다른 모든 것들을 몽땅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우리 사회는 처음부터 아예 다양한 것들의 숨통을 열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이대생 개개인의 다양한 목소리는 출산 기피라는 엄청난 사회적 문제 속에서 존재 가치도 없이 묻혀져 버렸다.

한국 사회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상적이여야만 하는 사회 전체이고 모든 것은 가장 바람직한 사회 모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한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은 각기 다르게 생겼고 다르기 때문에 그 개개인은 더욱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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