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앞 전차와의 간격 유지를 위해 잠시 정차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리봉 역과 구로 역 사이에는 으레 이런 정차가 있었다.

그것도 아침 출근 시간에 빼먹지 않는 의례였다.

예견된 성가신 일에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내 신경이 금방 마모되고 말 것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정차시간까지 계산에 넣고 출발했기 때문에 지각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열린 전동차 문 사이-이미 포화상태인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의 승객은 사실 서 있다기보다 스펀지에 꽂힌 채 흔들리는 핀셋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본래 모래알인 그들은 출근시간만큼은 전동차로 밀려들어와 찰흙처럼 차지게 응집하였다.

서의 발이 겹쳐지고 어깨가 바싹 붙어 있는 가운데 몇몇은 그 좁은 틈에서도 조간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내 손에도 역사를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놓여있는 가판대를 지나며 움켜쥔 무료신문이 들려 있었다.

아침 신문 보기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근사한 아침 열기일 수 있었다.

살기가 각박하지만 그래도 사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이 입추의 여지없이 좁아터진 틈을 뚫고 신문을 펼쳐 든 넥타이 아저씨의 속내에는 나름의 고민으로부터 비롯한 궁여지책의 측면이 분명히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 간의 이 일시적이고도 원치 않는, 오히려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응집상태에서 시선으로나마 거리감을 유지해 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이렇게 얼굴을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밀집 공간에서도, 나를 비롯한 승객들의 시선은 절묘하게 엇갈리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 오피스 걸들은 전철 안에서 책을 즐겨 읽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에세이류조차 가볍게 넘어갈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신문을 접어 읽는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신문을 보는 것도 팔을 들어올려 신문을 보면서 진동둘레가 늘어나 어떤 식으로든 개인 공간이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다른 승객들의 불편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물론 신문을 보는 본인도 편한 자세가 될 수 없었다.

잔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의바른 승객으로서 취할 수 있는(변태류의 남자 승객은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다) 행동은 세 가지 정도밖에 없었다.

흘러가는 창 밖의 풍경을 보거나, 전동차 안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거나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내가 타는 지하철 1호선의 경우는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교회나 상가건물, 아파트 단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주로 후자의 두 가지 방식으로 원치 않는 응집상태를 견뎌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두 상태의 결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고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뜬금 없이 생각의 꼬리를 물리는 것이었다.

생각이야 늘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내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꼭 맞물려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이런 시간이 차라리 아쉬울 만큼 여유로운지도 모른다.

이 전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발걸음은 정해진 바대로 학교를 향해야 하고, 수업이 끝난 뒤엔 언제나처럼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전동차 안에서 하는 생각에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것도 많이 생각하였다.

방금 전에는 오른쪽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오피스 걸의 향수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잠시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지하철 노선표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그 노선표가 단지 그림이었다면, 그녀의 행동은 약간의 정보성을 획득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광고지를 보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던 노선포는 전광판으로 된 것으로, 앞으로 내릴 역을 깜빡이는 전구로 표시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승객도 그녀처럼 되어야 했다.

과거의 일도, 현재 그들을 둘러싼 상황도 생각을 모을 지점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가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싣는다.

어제와 아주 다르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달라졌을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염원하며 승객은 목적지를 향한다.

9. 이런 만원 전동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것이다.

요즘 우리 또래에게 영화보기 및 음악듣기는 취미생활에서 필수항목처럼 자리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즐기지 않으며 특히 그런 것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나와 거리가 있다.

음악을 듣는다면 벅스 뮤직과 같이 스트리밍이 되는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서 인기순위 1위부터 100위까지 검색해서 들을 것이다.

영화라면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영화를 시청하거나 가끔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 내 방식이다.

길거리를 걸으며 음악을 듣는 휴대용 카세트를 사려고-요즘엔 주로 엠피 쓰리를 사는 듯 하다-용산 거리를 돌아 다니는 아이들은 공감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관을 찾아 영화를 관람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들은 나와 처지가 많이 다르다.

대부분 부모로부터 크게 부족하기 않을 정도의 용돈을 받아쓰고 산다.

적어도 대학을 다닐 동안은 해외 배낭 여행을 가거나 명품 가방을 구입하는 등의 목적이 아니면 돈을 따로 모을 필요도 없다.

지금 나에게는 뒤통수만 보이는, 머리에 젤을 발라 잔뜩 모양을 낸 갈색 염색머리의 남자애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로 보인다.

이 남자애는 지금 나에게 여러 가지로 탐탁하지 않게 여겨진다.

이렇듯 서로 불편하게 몸을 끼우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유쾌하게 느껴지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적어도 불쾌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애는 나뿐만 아니라 그 주변사람들에게 불쾌한 존재가 되고 있다.

아침 출근 시간 전동칸에서 자신이 하드한 롹 장르의 음악을 즐긴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동안은 이렇게 주변에까지 들릴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이어폰을 낀 사람들을 보면 드러내 놓고 빤히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이 애의 뒤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으로 내 불만을 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제는 이런 사람들을 보아도 내가 자리를 피하거나 운이 없는 하루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그저 나는 나의 갈 길을 가면 그 뿐이라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와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은 그들 나름의 내일을 열어갈 것이다.

여기서 나의 내일은 분명 그들의 내일과는 다를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세상이 비교적 공정하다면 이런 생각이 단지 희망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이 되도록 나를 도울 것이다.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1호선과 2호선의 환승역이다.

환승역은 비교적 많은 승객이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 틈을 해치고 내리기가 쉬운 편이다.

응집되어 있던 승객들은 자신들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제각기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승객들은 무작정 흩어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흩어짐이란 곧 공동의 목적지를 가진 모래알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흐름 속에 편입한다는 것을 뜻했다.

역에서 내린 그들은 넥타이 부대 아저씨들, 젊은 오피스 걸들 이 주요 집단을 형성하는 가운데 나름의 흐름을 형성한다.

일단 신도림역 입구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2호선으로 갈아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시 사당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과 신촌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전동차의 빽빽한 사람들 틈을 빠져 나와, 환승역의 복잡한 인파 속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이 새롭게 형성된 집단의 흐름에 재빨리 편입하는 일이 필요하다.

흐름을 타면 그 안에서 제 길을 내는 일도 보다 쉬워진다.

어차피 분주히 움직이는 모래알 틈에서 생각하는 존재는 방해물일 뿐이다.

생각은 콩나물 시루였던 전동차 안에서의 꼬리물기로 충분하다.

어느 쪽도 옛 일과 같은 지난 일을 깊이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금’을 만끽하고 싶을 만큼 즐거운 공간도 아니다.

그들과 나는 최종 목적지만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예매해가며 관람하고 엠피쓰리에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이 길을 여유 있는 산책길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이하고 단순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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