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매장 밖에서 마네킹에 디스플레이 된 봄 신상품을 기웃대는 것은 너무 빤한 연기였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기 위해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에도 없는 옷들을 손으로 휘저었다.

내가 어떤 손님으로 이해될지 추측해 본다.

처음에는 청바지에 구매의사에 근접한 호감을 보였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입어보기까지 했다.

사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도 분명히 했다.

세 번째 방문은 나를 분명히 제 정신이 박힌 여자로는 보이지 않게 만들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게를 나와야 했다.

더 이상 청바지를 힐끗거리면서 티셔츠나 스커트가 걸려 있는 옷걸이를 밀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님 뭐, 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이번에 저희 신상품 중에 티셔츠랑 스커트도 잘 나온 편이거든요." 직원 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인다.

이젠 그냥 구경하려고 온 손님 행세를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확실한 구매의사를 확인시키지 않는 이상 이 난처한 자리를 모면할 방도가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한 가지였다.

구경중이다, 혹은 이것을 입어 보겠다, 아니면 지금 이것을 사겠다, 이런 대답이 아니면 손님이 의류매장 직원에게 건넬 말은 별로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나오는 방법이 유일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피멍이 들 듯 입술을 깨물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매장을 나와버린 경험. 스스로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해를 끼친 것처럼 모멸감이 훅 끼쳐왔다.

예상 가능한, 울적한 결말을 앞두고 옷걸이로부터 손을 뗀 후 청바지를 바라보았다.

내 쪽에서는 뒤 주머니가 보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든다.

직원의 시선에서 잠시 거리를 둘 여유가 생긴 것에 약간 안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때 체육부장이다.

반창회를 할거라고 한다.

고등학교도 졸업한 지금,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꼭 나오라고 성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나가지 않았을 성격의 모임이다.

옛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실망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곳에는 과거를 추억하며 아련한 향수에 젖은 사람들과 불운한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인양 지독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화를 받을 때는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올리며 매장을 자연스럽게 빠져 나왔다.

매장 직원들의 눈에 즐거운 만남을 앞두고 약속까지 남은 시간을 윈도우 쇼핑으로 보내고 있는 손님으로 비치게 하고 싶었다.

지금 그 손님은 약속시간이 다 되어 도착전화를 받고 매장을 아쉬운 듯 나서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뜻밖에 주어진 기회를 멋지게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난처한 결말이 무난히 넘어간 것에 즐거운 나머지, 그만 반창회에 참석하겠노라고 허락하고 말았다.

이 순간만큼은 옛 사람들을 다시 보는 일이 아주 참지 못할 일은 아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야지. 고등학교 가서도 너희들 보고 싶었고, 지금 고등학교 졸업해서도 가끔 너희들 궁금했어." "지원이 너 되게 반가워한다.

의외네. 그래 꼭 와라. 예전 우리 반장도 온다고 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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