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입고 온 검정색 주름치마로 갈아입는다.

백화점 매장을 방문할 때 치장에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은 나름의 불문율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학식이 높지만 가난한 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화려한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평소의 옷차림대로 만찬 장소를 찾아간 그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입구에서부터 제지를 당했다.

그는 가장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그곳에 갔다.

사람들은 아는 체를 하며 그 학자를 만찬장으로 이끌고 환영하였다.

이 때 학자는 자신의 옷을 벗어 음식 접시 앞에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옷아, 이 음식들을 실컷 먹어라. 이 음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주어진 거야." 지금은 공공연히 "옷에게 음식을 주는 세상"이 되었다.

특히 백화점은 상품 판매를 통한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고객의 금전적 능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 금전적 능력이란 실은 돈을 잘 버는 능력이라기보다는 돈을 잘 쓰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금전적 능력은 겉치장을 통해 상당 부분 정확하게 감지가 가능하다.

백화점에 잠재 고객으로서라도 신뢰를 주고 이로부터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으려면 그들의 기대에 걸맞은 치장이 필요한 것이다.

검정색 주름치마는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로 조신한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을 풍겼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는 조신한 맏며느리의 모처럼 외출을 반길 것이다.

"이런 스타일 많이 안 입어보셨죠? 손님 아직 나이도 젊어 보이시는데 정장도 세련되고 좋지만 지금 입으셨던 바지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들은 거의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구매 능력은 분명하나 구매 의사가 불분명한 고객이라고 말이다.

카드는 부모에게 압수 당하고 지갑에는 달랑 차비만 들어있는 여자가 눈앞의 손님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눈치다.

그들은 순진하게 검정색 주름치마를 믿었다.

누군가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배반하는 사람으로서도 편치 못한 일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들의 기대가 내 희망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청바지가 스판 소재라 오래 입기 나쁘지 않겠냐며 웃어 보였다.

재빨리 돌아서야 한다.

구매하지 않는 이유가 되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댄 뒤 시간을 끌지 않고 매장을 나서야 한다.

그들은 그 핑계에 대한 변명과 유효해 보이는 잠재고객에 대해 설득작업을 계속하려 할 것이다.

지금 카드, 아니 이 청바지를 살 현찰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종류의 설전을 적절히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난 가장된 유효고객일 따름이었고, 내 변명이란 이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물건을 사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스판 소재 청바지를 마뜩찮아하는 까탈스런 고객을 선선히 보내주었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서로 간에 친절을 다한 판매 직원과 옷을 보는 안목이 높은 손님으로서 나쁘지 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세 번째로 매장을 방문하였다.

그 여자도 적어도 오늘은 그 곳에 다시가는 것이 비상식적인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매장을 나선 뒤, 그녀는 백화점 층을 바꾸어 가구 및 식기 도구, 가전제품 등을 윈도우 쇼핑하였다.

여느 때와 달리 그 윈도우 쇼핑은 즐겁지 않은 발품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발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사고 싶은 물건이 분명히 있었고 그것을 사야 했다.

살 수 없다면, 마음에라도 담아두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입어본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일단 매장으로 가야 했다.

이 지겨운, 형형색색의 물건을 보러 돌아다니는 것보다 그 바지를 한 번 더 보아두는 편이 나았다.

매장으로 돌아가는 중에는 직원들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쳐야 하는가와 관련한 현실적인 고려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쁜 구두 발걸음을 내며 매장 앞에 섰을 때, 나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조금은 머리 속이 희미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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