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일 저녁 약속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저녁 일곱 시, 중학교 동창회. 중학교 3학년 반장이 이사 간 내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몇 다리를 거쳤는지 모르겠다며 한참 푸념을 했다.

그 여전한 말투가 안도감을 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당에 중학교 동창회를 한다는 것에 혹자는 좀 이상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반장의 구실은 수능도 끝났으니 멋지고 떳떳하게 호프집에서 회포를 풀자는 것이었다.

그 때 만한 우정이 없었다는 둥, 다모임 게시판에 자주 들어오는 애들 위주로 멤버를 구성했는데 니가 빠지면 안되지 않겠냐는 둥. 어떻게는 약속을 만들어 놀아보려는 심사가 빤히 보였다.

원래 자기 유리한 대로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오히려 잊었던 행복감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당황할 정도로. 중학교 졸업 이후 뭔가 강한 감동에 휩쓸려 보기란 참 오랜만이었다.

그 당시 앨범을 펼쳐보았다.

그들은 많이 낯설어져 있었다.

감색 교복 재킷에 회색 바탕, 검정 줄무늬가 있는 교복을 삼 년 동안 입은 시절이 있었다.

얼굴 하나 하나를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이름도 조심스레 입에 올린다.

목소리도 안정되어 있을 것이고 키도 훌쩍 컸을 것이다.

되도록 지금의 얼굴로 윤곽을 잡아보려고 애쓴다.

난 그 때, 교복 입던 시절의 그들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내게 익숙한 그들은 사진에만 존재한다.

내 기억, 사진과 겹쳐지는 그들의 얼굴은 이제 지워야 했다.

어떻게든 현실감 있게, 개연성을 가지고, 변했을 애들을 익혀야 한다.

낯선 존재를 익숙한 것으로 길들이기가 오히려 쉽다.

수건처럼 말이다.

좀 저돌적으로 자주 부딪치면 내 식대로 길들일 수 있다.

가장 익숙해지기 어려운 대상이 바로 3년만에 만나는 이 중학교 3학년 동창들과 같은 경우다.

이미 알았던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아주 모르던 대상처럼 무작정 밀어붙이기는 난감하다.

그럴 때는 우선 최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다.

기존에 알던 사람과 아주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화제가 궁해져서 서로 어색한 웃음만 흘리는 모습, 시계를 흘깃거리며 커피 잔을 꼭 쥐고 있는 모습 등을 상상한다.

구십 퍼센트 이상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

이 정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 익숙한 것이 낯설어졌을 때의 심리적 거리감 및 당혹감을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허한 느낌은 남는다.

처음 만난 대상을 향한 낯선 느낌에는 가벼운 흥분과 기대감도 섞여 있다.

그러나 익히 알았던 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되었을 때 섞이는 감정이란 일종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었다.

앨범 페이지 한 쪽을 일부러 건너뛴다.

그 페이지의 왼쪽, 위에서 두 번째로 내려온 곳에 지원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애들이 변한 모습은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고 제법 그럴싸했다.

제멋대로 그려대는 낙서처럼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원이는 잘 되지 않았다.

잘 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 사진만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다른 애들을 만나게 되면, 새 모습, 변해간 얼굴을 기억에 겹쳐놓을 것이다.

지원이를 보면, 사진 속의 모습을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다.

그것을 머리에 새겨놓겠다.

그러면 난 옛날의 그녀로부터 퇴색하고 변해버린 모습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선명한 윤곽선을 보탤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깊고 또렷하게 그녀를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도 날 만났을 때, 삼 년 전의 그 때를 보아주길 바란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의 나를 아주 몰랐던 사람, 처음 알게 된 사람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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