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7일, 비. 아침에 렌즈가 말썽을 부렸다.

두 달만 쓰고 버리게 되어있는 얇은 소프트렌즈는 원래도 눈에 잘 들어가질 않았었다.

간신히 오른쪽 눈에 렌즈를 넣었는데, 눈을 한번 깜빡였더니 눈꺼풀 안쪽에 붙어서 눈동자 위로 올라가 버렸다.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게 아팠다.

꺼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겨우 다시 꺼내서 세척액으로 헹군 후에도 세 번쯤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제대로 넣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왼쪽 렌즈를 꺼내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렌즈를 한쪽 눈에만 넣은 탓에 모든 것이 빙빙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원근감각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려다가 세면대에 머리를 부딪쳤다.

머리가 쾅쾅 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렌즈를 끼지 않은 왼쪽 눈을 감고 한쪽 눈만 뜬 채 손으로 축축한 타일 바닥을 일일이 더듬어야 하는 것이 훨씬 짜증나는 일이었다.

렌즈는, 오빠가 치약을 잔뜩 묻혀놓은 세면대의 옆면에 붙어 있었다.

그걸 찾아내서 왼쪽 눈에 넣었을 때는 이미 여덟시 이십분이었다.

자습시간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지금 준비하고 나간대봤자, 여덟시 사십분에 시작하는 첫 수업시간에도 맞추지 못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팬티만 입은 채로 문을 활짝 열고 거울에 샤워기로 찬물을 발사하자, 눈과 얼굴이 온통 벌겋게 된 내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 마를 새가 없었던 교복을 대강 다려 축축하고 따뜻한 채로 대충 꿰어입고 밖으로 나왔더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게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과, 지나다니는 차들과, 맞은편의 편의점 같은 것들 말이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살고 있는 16층짜리 분홍색 아파트 건물도 한순간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들은 주르륵 흘러내리다가 땅에 튕겨지면서 바다 비린내를 풍겼다.

벌써 사흘째 비가 지치지도 않고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내내, 나는 한기를 느끼며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에 묶인 것처럼 얕은 잠에 취한 채로 빗소리를 들었다.

빗소리가 사정없이 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빗소리 사이사이로 자동차의 주황색 헤드라이트 불빛과 쏘는 듯한 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창문을 닫아야지 하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어서, 허리가 아프도록 뒤척이며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말하자면, 스무 장의 매트리스 위에 완두콩 하나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스무 장의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어마어마한 잠자리 위에서 시험받는 공주의 기분 같은 것이다.

완두콩 하나 때문에 온몸이 배겨서,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게 이 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긋나는 모든 것이 다.

학교까지는 반도 못 갔는데, 이미 여덟시 오십분이었다.

지금쯤 담임이 칠판 가득히 수학 풀이를 적고 있을 것이다.

담임은 수업시간에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공식과 풀이과정을 적는다.

칠판 왼쪽 맨 위에서부터 오른쪽 맨 아래까지. 다 적고 나면 지우고 다시 적는다.

그렇게 다섯 번쯤 칠판이 채워지면 담임은 머리에 분필가루를 뒤집어쓴 채 허옇게 된 손으로 출석부를 들고 나간다.

우리 아빠 정도 나이의, 곱슬머리를 한 담임은, 안경을 코끝에 걸쳐 쓰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누군가를 지목해서 풀이를 시키기도 했다.

그런 날은 지독하게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재수가 없는 건, 담임 시간에 지각을 해서 칠판 옆 시간표 앞에 한 시간 내내 서 있는 경우다.

헐레벌떡 뛰어가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좀 봐주기도 하지만 어떤 핑계도 통하지는 않는다.

말을 듣는 것도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늦게 들어갈수록 서 있는 시간은 짧아지니까. 2003년 7월 7일, 신희. 발자국 수를 세가며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갑자기 옆으로 뭔가가 휙 스쳐 지나갔다.

빗속에서 달려가는 그것의 잔영이 길게 내 옆에 남아서, 마치 너무 빨라 지나간 자국이 몇 백 개의 그림자로 남는 플래시를 보는 것 같았다.

신희였다.

가무잡잡하고 긴 다리가 조심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물웅덩이들을 철벅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또 늦잠을 잔 게 뻔했다.

신희는 늘 저렇게 뛰어서 1교시가 시작된 후에야 교실에 골인한다.

1교시가 담임시간일 경우에는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했다.

내가 보기에는 다양한 핑계의 내용을 떠나 무슨 말이든 믿어줘야 할 만큼 간절하고 귀여운 표정이었지만 담임에게는 잘 먹히질 않아서 문제였다.

그래서 그애는 남은 수업시간 내내 시간표 앞에 서서 담임이 잘 모르게 아이들을 웃기곤 했다.

아이들은 담임이 뒤돌아 칠판에 숫자와 기호들을 쓰는 내내 신희 때문에 킥킥거리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애가 좋았다.

신희가 저만치 달려가다 말고 그제서야 자기가 지나쳐 간 게 나라는 걸 알고는 멈추어 서서 뒤돌아 보았다.

어깨쯤 오는 검정색 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애가 씩 웃었는데도 나는 서둘러 걷거나 뛰지 않고 그애를 못 본 척 걸었다.

며칠 후면 기말고사가 시작될 텐데 우리는 아직 서먹한 사이였다.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고, 학교 밖에서 만나면 쑥스럽게 인사하는 정도였다.

신희와 가까워지자 발이 엉켜버렸다.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더니, 한 발은 물이 고인 곳을 너무 세게 디뎌서 신발 속으로 물이 출렁거리며 들어왔다.

다른 한 발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옆으로 비틀렸다.

발목을 살짝 접질렀는지 약간 아팠다.

야, 장수현! 그애가 경쾌하게 나를 불렀다.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친근해 보였다.

너도 지각이야? 담임 시간에 지각하면 피곤한데. 신희는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나는 그애와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지난번 떨어뜨려 금이 가 버린 우산 손잡이만 매만지면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신희가 내 팔을 툭 쳤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야, 근데 너 왜 그렇게 천천히 걸어? ……앞에 서 있기 싫어서. 나는 원래 이렇게 부끄러워하며 우물쭈물 말하는 애가 아니다.

하필 그 애 앞에서 이렇게 못나게 군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신희를 내버려둔 채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계속 걷는데도 신희는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신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해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신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하, 하고 짧은 숨을 상큼하게 내뱉더니 좁은 보폭으로 다다다다 뛰어와서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수업시간에 안 서 있는 만큼은 교무실에서 채워야 돼.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 갈래? 그리고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신희의 손도 내 손목도 비 때문에 흠뻑 젖어있었다.

게다가 내가 신희보다 턱없이 느려서 손목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애의 손에서 손목이 빠질 때마다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아팠다.

손목이 빠져도 그애는 다시 잡고 달렸다.

온몸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머리에서도 어깨에서도 옆구리에서도 제멋대로 맥이 뛰었다.

나는 신희가 나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다가 우산을 놓쳤지만 계속 달렸다.

내 몸에 떨어지는 비가 심장인 것처럼 후두둑 후두둑 심장소리를 냈다.

그렇게 교문까지 와서 모퉁이를 돌다가 낮은 둔덕에서 미끄러져 좀전에 접질렀던 발목을 다시 삐끗했다.

무릎 아래가 까져서 피가 났다.

신희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나를 일으켜세우고 실내화 갈아신는 것을 도와주고, 내 가방을 든 채로 나를 부축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아프긴 했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교복과 피가 흐르는 다리는 예상외의 효과가 있었다.

신희의 진지하고 걱정스러우며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표정도. 우리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체육복을 집어들고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양호실까지 가는 길 내내 키득거리면서 신희의 부축을 받았다.

몸이 닿은 부분의 교복이 젖은 채로 따뜻해졌다.

다시 비가 나를 두들기는 것 같았다.

양호실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치료를 받은 다음, 양호실 선풍기에 교복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양호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호선생 취향의 클래식 방송이 아주 작은 소리로 공기 속을 떠돌고 있었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신희가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니 그애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앉아서 신희의 얼굴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고, 큰 눈이 다 감기지 않아서 흰자위가 보였다.

솔직히 보기 흉했다.

순간 그애가 굉장히 피곤하게 사는 어른처럼 보였다.

코를 골거나 이를 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라보자, 이번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처럼 보였다.

바로 그 때 1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들려, 그애를 깨워서 함께 양호실을 나왔다.

교실로 가는 길에는 둘 다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애가 어설프게 내민 팔을 잡지 못하고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교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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