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 교수(영어영문학 전공)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제 종일 퍼붓던 폭우 탓인지 바야흐로 신록은 검은색 녹음으로 변하고 있군요.?봄 학기가 끝나고 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학기말 시험과 논문심사·성적 제출 등 숨가쁜 마무리를 앞두고 여러분과 나는 골인을 앞둔 단거리 주자들처럼 다시 한 번 기운을 추스릅니다.

내게 이번 봄 학기는 좀 어수선했습니다.

개인적인 부실함 탓도 있겠지요. 또 내 수업이 들어있는 월·수요일에 공휴일이 많았던 탓도 있어요. 수업의 흐름이 자주 중단됐고 이 때문에 밀린 진도를 맞추느라 숨이 찼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봄의 이런저런 어수선함은 지금 이 곳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정들 때문일 것 같습니다.

나라 안의 어려운 살림살이와 나라 밖의 전쟁이 우리의 일상을 교란하고 있지요. 한쪽에서는 탄핵과 총선, 무너지는 중산층, 느닷없이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웰빙 열풍이,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민주주의 수호와 악의 제거를 외치며 공중파를 통해 끊임없이 방출되는 테러와 폭력, 야만이라는 단어들과 증거들이 우리의 눈과?마음과 몸을 기진맥진하게?합니다.

??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지요. 금화터널 속으로 끊임없이 차들은 질주하고 코앞에서는 상가와 백화점이 높아지면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지요. 한쪽에서는 학문의 자유를, 또 한쪽에서는 경쟁력 있는 기능인·유능한 직업인이 될 것을 각기 소리 높여 요구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한순간도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손에서, 귀에서 핸드폰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모든 불협화음에서 도망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강의실에서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귀를 기울이는, 또 대강당 앞길을 왁자지껄 눈부시게 몰려나오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묻곤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가 제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 각자의 존엄성이란 어디 있는가. 또 이런 생각도 하지요. 학교라는 이 곳의 상징적 안전과 질서란 어쩌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때문에 지탱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돈과 유혹으로부터 우리가 제정신을 지키는 일이?더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소용돌이와 단절된 평화와 순결이란 오래지 않아 고인 물이 되고 소외돼 시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동시에 내 안의 질서를 지키는 그 역동과 긴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제정신을 잃지 않고 지킨다는 소리일 것입니다.

? 이제 곧 기말 시험이 끝나면 방학입니다.

우리들은 각자 강의 시간표를 벗어나 훤하게 열려 있는 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여름은 생명의 열기가 가장 충일한 때입니다.

?산과 들에서, 과수원에서, 또 길가의 작은 풀 속에서 곡식과 열매와 씨앗들이 생기고 단단해지지요. 어디서 무엇을 하건 여러분과 내가 진정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헐거워진 일상 속에서 광활한 대지 속에서 새삼 나의 존재에 대해, 생명에 대해? 성찰하는 순간들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지만물과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난 젊은이로서의 나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오래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지요. 혹시 이 바쁜 세상에 그것은 지적 허영이고 사치라 한다 해도 우리의 안녕을 위해서 이 질문과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세상을 지키는 우리의 역할이라고, 여러분과 나는 여전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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