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도시화와 무분별한 개발로 공간 정체성 사라져

건축물이라는 세포로 이뤄진 ‘생명체’ 도시는 사람의 온기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에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할 뿐아니라 무관심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지난 1964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을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의 서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다음의 일기 형식을 통해 보려 한다.

#서울이 움직인다, 고향이 사라진다 -10월 26일 PM 2:00 구로공단 오랜만에 내가 태어난 동네인 구로공단을 찾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나란히 늘어선 공장 굴뚝 대신 최신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알고보니 서울시가 90년대부터 ‘주거공간 서울’의 이미지를 위해 기존의 산업 공간을 줄이는 대신 신산업을 유치해, 지난 2000년 12월 첨단디지털산업단지가 됐단다.

60년대 전까지 서울은 ‘중심업무지구-점이지대-노동자주택지구-공업지대-교외주택지’라는 명확한 도시 위계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 중심업무지구의 블록화·중상층 교외거주인구 증가 등으로 깨졌다.

80년대에는 서울 도시계획의 핵심인 ‘도심재개발 사업’이 서울 공간의 맥락이 고려되지 않은 채 전개됐다.

이에 대해 서울시립대 손정목 명예교수(도시행정학 전공)는 이 사업이 “도시의 연속성을 파괴했다”고 평한다.

90년대에 들어서야 발전 위주의 개발을 멈추고 이 공간 속에 숨겨져 있는 ‘서울다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싹텄다.

남의 옷을 빌려입은 듯 어색한 구로공단의 오늘 모습은 이런 과정의 산물이었다.

‘고향’의 달라진 모습에 상실감이 밀려왔다.

#이상한 서울의 서울인 -11월 3일 PM 6:00 신촌 ‘서울 토박이’가 서울에서 길을 잃었다.

한참 길을 더듬거리다보니 내가 걷는 곳이 서울인지, 걷고 있는 사람이 나인지조차 헷갈린다.

이미 서울은 너와 나·공과 사·문화와 경제·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지워지고 뒤섞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미국 부르클린대 쥬킨 교수(사회학 전공)는 이와 같은 현상을 ‘역공간(liminal space)’이라고 명명했다.

단국대 조명래 교수(도시지역계획학 전공)는 “서울은 다른 것이라고 해서 배제하지 않는 역공간”이라며 “포용력이 커서 종로·가회동·명동 등 다채로운 공간을 품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나친 역공간화는 서울의 정체성 혼돈으로 이어졌다.

무표정한 건물들, 무질서한 도로, 무분별한 토지이용 등이 현재 서울의 모습이다.

이처럼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춘기 서울’의 도시정체성 회복을 위해 서울시는 이제서야 ‘문화거점 지향형 도시개발방법(Culturefront)’을 통해 문화적·지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옛 성벽·건축물·교량 등 주요 역사 유물들은 파손됐다.

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인공 건축물들은 산으로 이뤄진 자연적 스카이라인을 침해했다.

게다가 이 어지러운 거리에서 어떻게든 튀기 위해 걸어둔 무질서한 간판들. 앞으로도 서울의 길은 낯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 거대한 우주 -11월 24일 PM 10:30 지하철 2호선 한강 철교를 지나며 밖을 바라보니 하늘과 강에서 인공의 별들이 반짝인다.

그래서일까. 현재 서울은 도시의 활동 거점과 마디가 은하수의 별처럼 다양한 형태로 포개진 은하수적 도시구조(galatic metropolis)의 포스트모던 도시다.

이는 우선 그간의 노점행위·불법 무단 주거 등 무책임한 토지 이용이 기존의 엄격한 공간 구조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도심이라는 하나의 핵만 갖고 있던 이전의 서울과 달리 현재 서울은 구도심인 종로구·중구 등과 하위 중심 거점인 청량리·신촌·영등포 등이 함께 서울의 다핵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 서울 시가지는 무질서하게 확산(urban sprawl)되는 과정에서 서울 주변 공간을 잡아먹었다.

게다가 경계가 불분명한 서울 밖의 건물을 서울 건물로 간주하는 특이한 관례까지 생기면서 오늘날 서울에서는 범주조차 정할 수 없는 ‘경계의 소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도시 구조로의 진입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도시철학자 루이스 멈포드에 의하면, 이런 도시는 기능·형태가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언젠가 서울의 다양한 공간들이 눈·코·입처럼 조화를 이뤄 서울 전체가 은하수처럼 빛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는 사이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