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자살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우리의 귓전을 때리고 있다.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죽음의 시점을 서둘러 결정지으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울과 애도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재 삶의 풍경화를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 더욱 춥고 으시시하다.

느림 혹은 성스러움의 범주와 함께 우리들 삶의 영역에서 점차 배제되어 버리는 우울의 정서. 우울은 때론 무섭도록 깊은 두려움의 바다로 출렁인다.

그래서 우리는 ‘아, 꿀꿀해. 뭐 신나는 일 없을까?’라는 식으로 우울을 무마시키려 애쓰는 친구의 얼굴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 의미의 상실이 가슴 속에 후벼 파놓은 상처에서 번지는 핏물을 핥고 울부짖으며 그 슬픔의 독한 맛에 정신을 잃을 수 있는 여유와 권리가 점점 부정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리비도가 집중되었던 대상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동일시라고 정신분석은 가르친다.

‘너는 떠났으되 나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았다’는, 일견 신파 같이 울리는 명제가 모든 자아 정체성의 구성원리라는 것이다.

즉 자아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대상 리비도 집중의 침전물이며 이렇게 볼 때 슬픔이란 자기애 다시 말해 나르시스적 지지를 기반으로 자아를 통일된 전체로서 드러내는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했으되 이제는 포기되어야만 하는 대상을 나의 자아로 흡수, 통합시키는 것은 얼음같이 차갑고 고통스러운 늪을 통과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과정은 무엇보다 어머니에의 동일시 및 어머니 욕망이라는 한 축과, 아버지의 남근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다른 축 사이의 갈등과 투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여성의 성장에서 더욱 치열하다.

여성의 가치가 남성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곳에서 여성의 성장이 자리잡게 되는 이러한 분열된 위치. 여성의 우울이 근본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이 위치에서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우울, 즉 비천함의 밀도와 위력을 내장하고 있는 애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사랑과 관계없는 글쓰기가 있을 수 없듯이 멜랑콜리가 개입되지 않은 상상력은 있을 수 없다’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스무살 여우들은 어쩌면 상실을 인정하고 우울에 강타당하기에는 너무 자존심 강하고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울의 우물에서 길어낸 그대들의 노래소리는 얼마나 색다른 음색으로 아름다울 것인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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