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소수 인재 중심으로 인문학에 치중돼,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학문 흐름 이어가야”

‘이화로, 세계로, 미래로’ 이처럼 우리 학교는 명문 사학으로서의 이화, 세계를 이끌 이화, 그를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이화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30여개의 연구소와 21개의 직·부속기관, 의과대학과 종합병원까지 갖춘 여자대학이 해외에도 드문 것을 고려해 보면 시설면에서 이화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117년의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학문공동체 이화의 학문적 연구 흐름은 몇몇 분야에만 한정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수한 교수진과 학생들의 유치에만 급급할 뿐 이들을 묶을 수 있는 ‘이화학파’의 형성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화’에서 싹튼 학문 이화의 학문적 흐름은 여성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분야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가장 흐름이 활발한 분야는 단연 여성학이다.

1960년 처음 여성학을 설립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학을 제도 교육으로 정착시켰으며, 타 학문과의 연계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중 이효재 전 사회학과 교수의 여성사회학은 한국사회를 여성해방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으로 한국의 자생담론 중 하나로 꼽힌다.

학부에 여성학 관련 커리큘럼이 많을 뿐 아니라 대학원 여성학과·한국여성연구원·여성신학연구소·아시아여성학센터 등의 연구 기관에서 다양한 각도의 여성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이어령 교수를 필두로 한 문학 분야의 기호학적 비평론도 학계에서 ‘이화여대적 학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뒤이어 연구하고 있는 김현자 교수(국어국문학 전공)는 “텍스트 분석에 충실한 구조주의적 기호학은 70년대부터 이어져 온 이화의 대표적 인문학”이라며 “학파 명칭만 없을 뿐 실질적인 이화학파”라고 설명했다.

1987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우리 학교 기호학 연구소는 기호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논문이 배출되는 곳이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진덕규 전 정치외교학과 교수에서 차남희·최은봉 교수로 이어지는 역사정치학 연구를 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정치학을 해석하는 역사정치학은 서구 이론 중심의 정치학계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진덕규 교수가 이 분야를 개척한 것을 계기로 우리 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차남희 교수(정치외교학 전공)는 “진덕규 교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회원들이 한 달에 두 차례씩 우리 학교에서 학술 모임을 갖는다”며 “이것이 이화의 학파적 흐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철학 분야에서도 소흥렬·정대현·김혜숙 교수로 이어지는 분석철학적 흐름이 70년대부터 국내 철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 왔다.

또 원효의 일심사상과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철학을 접목시킨 신옥희 전 철학과 교수의 연구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연계시켜 비교철학 분야에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한자경 교수(철학 전공)가 이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씨앗은 있으나 토양이 부족한 ‘이화학파’ 이처럼 이화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학문적 연구 흐름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화에는 학파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이 영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전통적 학문에만 치우쳐 있고, 대부분의 학문은 교수들 개인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1970년대부터 각 학문과 관련된 연구소와 대학원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화의 학문적 흐름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긴 했지만 교수간 뿐 아니라 학생과 교수간 연계망도 활성화되지 못했다.

학문 공동체로서의 이화 네트워크가 형성돼야 학문에 힘이 실릴 수 있고, 지금보다 다양한 학문 활로의 모색도 가능해진다.

또 이를 통해 ‘여자는 학문을 하지 못한다’는 틀을 깨고 학계및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학문적 흐름이 인문사회학 분야에 치우친 것도 보완해야 할 점 중 하나다.

상대적으로 실용 학문 분야인 공대·의대·사범대 등은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무에 치우치거나 유행을 좇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취업률·고시 합격률을 위해 정형화된 교육을 시키거나 유행하는 연구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학문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이러한 분야도 이화만의 학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깊이있는 연구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화학파’의 주체, 이화인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독일), 시카고 학파·메릴랜드 학파(미국) 등은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시카고 대학 등을 근거로 형성된 대표적 학문적 네트워크이다.

이화가 ‘세계로, 미래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이화만의 흐름을 내세울 수 있는 학문적 경향의 확립이 시급하다.

단기적으로는 학교 서열과 홍보를 떠나 진정한 학문적 열의를 가진 학생을 유치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자발적 ‘이화학파’를 통한 학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본적 방안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이화에 왔다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이같은 현상이 여성학을 넘어 다른 학문 분야에도 확대될수록 이화의 토양은 풍성해 질 것이다.

우리 학교 정대현 교수(철학 전공)는 “이화에 정식으로 체계화된 학파는 없지만 씨앗으로서의 학파는 있다”며 “이것이 구조적 학파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래의 ‘이화학파’는 이미 싹이 텄다.

그 싹이 잘 자라도록 키우는 것은 교수와 학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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