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문화이론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론(Theory)’이라는 독특한 분과와 ‘철학’이 엄밀하게 구분된다.

‘이론’은 유럽 철학·정신분석·인류학·문학이론·정치학 등이 융합된 새로운 학문으로, 주로 문학 분야의 학과들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에 반해 ‘철학’에서는 주로 분석철학과 현상학 등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이론’분과에 속하는 지젝이 기성 철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제도적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다.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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