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실재와 이데올로기가 합쳐진 것

동유럽의 기적 vs 기생학문을 하는 자. 극단의 두 명칭을 가진 문제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교수)이 5일(일) 처음 한국을 찾았다.

슬로베니아 출신인 그는 선진적 학문 연구가 이뤄지는 구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냈다.

이 해석은 현재 사회·문화이론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가 몸담았던 학회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시초가 됐다.

그러나 그는 라캉의 이론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어 ‘기생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다.

서울대 김상환 교수(철학 전공)는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새로운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고 그의 한계를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쓰여진 그의 글은 전통적 글쓰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 받는다.

지젝은 라캉을 이론적 틀로 삼아 헤겔 철학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맑시즘·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비판 이론을 다시 분석했다.

기본적으로 라캉은 인간을 결핍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봤다.

이러한 그의 ‘욕망이론’에는 인식의 세 단계가 제시된다.

즉 욕망을 모방하는 ‘상상계’· 언어를 통해 욕망을 인식하는 ‘상징계’·이 둘을 연결하는 ‘실재계’가 그것이다.

라캉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 상징계에 주목해 여기에서 라캉이 욕망을 표현하는 매개로 언어를 들었기 때문에 신체를 매개로 하는 ‘쾌락’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지젝은 라캉이 후기에는 욕망이 허상임을 깨닫고 다른 욕망을 찾아나서는 실재계에 관심을 뒀다고 반박하며, 이데올로기 이론·사회 이론·영화 등에 자신의 생각을 적용해 ‘지젝표 라캉 이론’을 전개한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영화는 지젝에게 있어 라캉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득한 세계다.

특히 그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1960)에서 나타나는 ‘맥거핀’을 라캉의 핵심 개념인 ‘실재적 대상’의 실례라고 설명한다.

맥거핀이란 일종의 ‘위장된 복선’으로 영화 내내 뭔가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아무 의미도 없는 극적 장치를 뜻한다.

‘싸이코’에서 여 주인공이 훔친 돈다발은 영화 초반에관객을 긴장시키지만 결국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한 지젝은 인간의 모든 판단에는 이데올로기가 관계한다고 본 알튀세르의 견해를 라캉의 욕망이론을 통해 비판,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란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우리가 실재계에 마주쳤을 때 겪게 될 파국을 막고 지금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허구라고 본다.

예를 들어 왕권국가의 왕은 이데올로기라는 ‘허구의 옷’을 두른 사람이다.

만약 왕에게서 이데올로기라는 허구가 제거되면 하나의 육체에 불과한 왕의 실재가 드러날 것이고 그 사회는 곧 와해될 것이다.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실재를 가린다는 이유로 부인할 수 없는, 한 사회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악인 것이다.

그래서 탈이데올로기 시대인 오늘날에도 민주주의·냉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지젝의 라캉을 통한 뒤집어 읽기는 국제 관계와 정치 이론에도 유효하다.

그는 그의 조국을 비롯한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을 간과해 전체주의 국가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가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슬람 세계를 ‘인식’시킨 계기라 보고, 여기에서 현재 미국 중심적 식민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봤다.

이처럼 지젝은 사회변혁을 위한 단서를 발견해내기 위해 끝없이 현실적 사안에 주목한다.

우리가 미처 파악해내지 못한 세상의 실체를 고발하는 그는 우리에게 일상으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다.

<강연 일정> ▷7일(화) 실재의 열망, 가상의 열망 (오후3시/서울대 박물관 강당) ▷8일(수) 지젝과 함께 영화보기:신체 없는 기관 (오후6시/세종문화회관 세종홀) ▷9일(목)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오후5시/대구 계명대 성서캠퍼스) ▷10일(금) 소프트혁명의 시대 (오후2시/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 ▷12일(일)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 (오전9시/서강대 다산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