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찢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 천안문 광장에서 가까스로 죽음을 피한 한 학생의 증언이다.

1989년 6월4일 약10만에 가까운 인민 해방군 계엄부대는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에 총을 겨눴다.

같은 해 4월15일 학생 운동을 진압하지 못하고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중국공산당 총서기 호요방은 당내 토론에서 사회 문제의 근본원인이 당내에 있다고 주장하다 쓰러져 죽음을 맞는다.

호요방의 명예회복 요구를 목적으로 집결된 천안문 광장 앞의 시위는 중앙당의 정책 반대, 민주화 요구로 확대된다.

이에 시위대에 인민해방군의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장갑차와 전차에 뒷걸음치던 학생과 시민들이 깔려 죽는 비극을 낳은 천안문 사건을 ‘피의 일요일’이라 부른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발견된다.

80년대 중반 사유제도 아래 농민의 등장은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경제를 활성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농산물 수매가 인상정책은 재정상태 악화를 가져왔고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 결국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일부기업과 당 간부 수중에서만 유통돼 경제는 더욱 혼란 속에 빠진다.

결국 1988년 중국 정부는 긴축정책을 채택했지만 이미 국민들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정부를 불신하고 당간부들이 부와 지위를 독점하는 등 소득불평등 현상이 심화되면서 불만이 고조됐다.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막을 내린 천안문 사건은 자본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는 상황 속에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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