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독일에는 유령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은 문화학이라 불린다.

그것이 정착한 곳에는 버섯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문화학연구소가 생기고 있다.

문헌학자·철학자·역사학자·사회학자는 문화학자가 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문화를 이 시대의 화두로 삼았던 것일까? 독일에서 60년대 말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됐다면 이 문제의 해결사로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학이다.

인문학은 ‘정체성 위기’에 내몰렸고, 아직도 제대로된 자신의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보편적 인간정신을 탐구하고 이로부터 도출된 행위규범을 교육하는 학문으로 자신을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보편인간과 통일규범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신념의 몰락은 곧 인문학의 정체성 위기를 동반했다.

이제 인문학은 문화학으로 전환돼야만 했다.

문화학은 물론 통일적 인간관과 세계관을 마련해서 보편적 규범체계를 마련하려 하지는 않는다.

문화학이 목표로 삼는 것은 인간의 자기·세계이해다.

이를 위해 문화학은 문화로 연구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한 문화에 의해 인간은 역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중반부터 독일 대학들은 문화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이런 새로운 시도를 촉진시켰던 것은 국제적인 영향, 특히 영미권의 ‘문화연구’·‘신역사주의’와 프랑스권의 ‘심성사’·‘담론분석’등의 영향이다.

독일의 인문학은 자신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학문의 국제적인 흐름에 뒤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문화학이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대상영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문화기제들이 그 대상영역이다.

첫째, 지식이 생산되고 분배되는 매커니즘, 즉 학문문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의 학문문화에서 어떤 패러다임이 승리하고 또 몰락했는가에 따라 인간의 세계해석방식과 일상생활이 변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에 관한 연구, 즉 자연의 문화사에 대한 연구이다.

자연은 그 동안 자연철학적·종교적·도구적·낭만적·생태적 등의 관점에서 상이하게 해석돼 왔고, 자연과학에 의한 자연이해는 근대 이후의 일이다.

상실된 자연의 지각 및 해석관점들을 복권시켜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 한다.

셋째, 인간에 대해 기술이 갖는 규정적 힘을 탐구하는 기술의 문화사가 있다.

부분적 의미를 가졌던 기술이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전면에 등장했는가를 살펴보고, 기술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 매체(미디어)에 관한 연구다.

인간은 항상 매체에 의해 매개돼 있다.

달리 말해 매체에 의해 규정돼 있다.

다양한 매체들의 탄생사를 살펴보고, 각각의 매체들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행위·체험구조를 변형시키는가를 관찰한다.

대중매체연구는 그 중심을 차지한다.

다섯째, 위의 연구의 결과물을 토대로 인간관의 역사적 변화를 탐구하는 역사적 인간학이 있다.

인간에 관한 담론들의 탄생사와 인간의 사유·행위·상상력·감각·감정·느낌 등을 코드화하는 과정을 탐색한다.

감각의 역사에 대한 탐구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문화학의 과제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문화기제들의 생성 및 작용연관을 역사적·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모델화해 지식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그 지식들은, 대중이 스스로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의 실천적 행위방식을 고안할 때 영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성균관대 이상엽 교수(현대철학 전공)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